신앙인이란 하나님을 '궁극적 관심'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궁극적 관심'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삶의 중심가치'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의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람에서 왕 다음가는 실력자였으나 그 당시로는 천형으로 알려진 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아람에선 자신의 병을 치료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나아만의 집에서 일하는 이스라엘 출신의 여종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라면 당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실력자라는 그의 위상에 걸맞은 수많은 호위병사, 병거와 예물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을 공식적으로 친견한 후,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장군의 행렬을 마중나온 것은 엘리사 본인이 아닌 엘리사의 말을 전하는 사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은 간단했습니다. ‘요단강에 네 몸을 일곱 번 담그면 깨끗해질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나아만은 돌아가려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모욕감을 억누르고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 자기 몸을 일곱 번 담갔습니다. 그가 물 위로 올라 왔을 때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의 몸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깨끗해졌다."
'어린아이의 피부처럼'이란 비유를 쓰는 것은 나아만이 마치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을 상징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로서, 병에서 치유된 나아만은 그가 이제껏 섬기던 아람의 신 림몬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섬길 신을 바꿉니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는 신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아만이 자기가 섬길 신을 바꾸었다는 것은 그의 '궁극적 관심'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궁극적 관심은 '삶의 중심가치'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아만의 궁극적 관심이 변했다는 것은 삶의 중심가치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궁극적 관심'을, 또는 '삶의 중심 가치'를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자기 궁극적 관심으로, 삶의 중심가치로 삼으면 그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중심가치에 따라서 여타의 모든 가치들의 위상을 자기의 삶 속에서 재편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이 삶의 중심가치가 되면 다른 모든 가치는 돈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삶의 중심가치로 삼는다면 하나님 이외의 모든 가치들은 그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게 될 겁니다. 그저 상대적인 가치만을 가지게 될 겁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신앙인이 된다,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인 우리는 과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탐내고 욕망하는 모든 가치들을 상대화할 수 있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을 욕망하거나 절대화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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