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슈프레강에서 라인강으로 혹은 새수도에서 구수도로...

by 이유재 posted Mar 0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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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본으로. 직장이 본대학으로 되었다. 여러모로 참 좋은 조건으로 간다. 자유대 연구소에서 친한 한 교수가 이 소식을 듣고 나에게 하는 말이 "그런 조건이면 로또에서 이긴 것과 같다"였다. 그래, 이런 건 능력으론 안 되고, 행운으로 되는 것이다. 그 행운을 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겠다.

2.
베를린은 사실 나의 제2의 고향이다. 거의 1/4세기를 여기서 살았다. 그리고 초기 나를 슬프게 만들고 마음을 무겁게 했던 이슬비와 거리의 회색에 - 나는 콜 수상의 시기를 나 개인의 "납의 시대"라고 부른다 - 얼마나 적응 했는지 더이상 거슬리지 않는다. 더이상 한국의 소나기가 장마가, 내리쬐는 해와 여름의 화창한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독일에 이렇게 적응해가는 동안 독일사회도 많이 변했다. 아무도 꿈꾸지 못한 통일이 밤새 이뤄지고 40년 넘게 임시수도였던 하나의 소도시는 그 역활을 다하고, 옛수도이자 새 수도가 된 베를린은 장벽이 사라지면서 섬성격을 완전 벗어 던지고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되었다. 많은 것이 베를린으로 쏠린다. 나는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것 같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수 있다. 새수도에서 구수도로... 하지만 하나는 벌써 말할 수 있다. 라인강은 슈프레강보다 몇배나 크더라 그리고 진짜 쏜쌀같이 빠르더라.

3.
그래 베를린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4.
얼마전 집에 방문온 다산이가 자기의 베를린시절 유치원의 마페를 정리했다.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하나 하나 검토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페에서 빼고 이건 버리라고 하더라. 왜 버리냐고 하니 마음에 안든다고. 그래 그도 이미 잘 그린 그림들만 간직하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나는 그 그림들을 버리지 않고 다산이가 간 다음 다시 마페에 넣었다. 옛날 한국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내 어머님께서도 내 공책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 두셨다. 왜 모아 두셨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공책들이 싸이는 걸 보면 내가 얼마나 공부를 하는지 알수 있었을 것 이다. 물질성은 속이기 힘든다. 독일로 이사를 하면서 다 버렸다. 진짜 아쉽다. 겨우 얇은 일기장 몇권 건졌다. 국민학교 다닐때 하루도 안 빼고 매일 일기를 썼는데. 베를린에서도 어머님은 우리 공책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하루는 복도에 있는 창고에 있던 책꼬지가 무너졌다. 와르르하고 공책과 종이뭉치들이 펼쳐지면서 복도를 가로막았다. 어머님께서는 야 이거 다 니네꺼니까 정리해라 하셨다. 나는 그 때 복도 한 복판에 앉아 반나절은 보냈을 꺼다. 내가 독일에 맨 처음 와서 막바로 학교에 입학하여 칠판에 있는 꼬부랑글씨를 배껴 그린, 그 나의 최초의 독일 공책도 그 중에 있었다. 그리고 몇 십장을 똑 같은 단어로 빽빽히 채우고 채우던 무식하게 독일어 공부하던 종이들도 그대로 있었다.  처음으로 독어로 장문 글짓기한 이야기를 읽었고, 천사와 우주인이 등장하고 후에는 내가 사랑하던 릴케의 시도 있었다. 지금은 책꼬지가 든든해서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끄집어 내면 김나지움때 내가 만든 학생신문과 대학 1학기 때 수업한 자료들과, 옛날 청년회에서 만든 잡지들과, 어쩌면 내가 김나지움 졸업하며 찍은 나의 처음이고 마지막 영화인 100분짜리 졸업영화도 있을 지 모르겠다.

5.
이사를 하면 짐을 싸야 한다. 짐을 싸야 한다는 것은 정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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