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개취아독성" 시인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시구다. 굴원은 중국 춘주전국시대때 초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진나라에 망하기 전에 제와 초의 연합 전선을 추진하다가 실패하고 쓰라린 고초를 맛보다 간 사람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취해있을때 나는 홀로 깨어있다" 한시를 읽다보면 옛사람들의 기개를 느낄 수가 있어서 좋다.
백만마디 논리를 전개하며 설파하는 것도 필요하겠으나 때로는 한 줄 싯구가 더 큰 감동으로 다가 올때가 있다. 그 감동으로 모진 고난을 넘어설 힘을 얻을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윤동주 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줄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했던 염원도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건대 이것이 고도로 정제된 언어의 힘이다. 언어의 힘은 극도의 절제와 압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폭발력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시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태초에 언어가 있었다. 태초에 언어가 혼돈의 바다 위를 지나다니고 있었다라고 생각 할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한승원의 소설 '추사'라는 책이다. 글씨로 널리 이름을 떨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책을 보면서 한승원이 전라도 장흥의 고향으로 돌아가 토굴에서 도 닦는다더니 정말 그렇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있는 추사선생의 삶도 그렇지만 엮어나가는 문장의 수준과 짜임새가 장난이 아니다. 깊은 내공을 느꼈다.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깊이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저 그런 내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칼의 노래를 비롯한 몇권의 소설로 필명을 날린 소설가가 김훈이다. 칼의 노래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 이순신의 철저하게 고독한 내면 세계를 그려낸 소설이다. 나는 김훈의 글들을 좋아한다. 그야말로 정제된 싯구와 같은 문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단문을 많이 사용하는데 단문이 주는 명료함을 느낄 수 있다. 한승원의 소설은 김훈의 소설과는 또 다른 맛을 준다. 김훈의 소설에서는 고독한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면, 한승원의 추사를 통해서는 고독한 한 인간의 내면세계와 삶의 지난함과 모진 고난과 쓰라림을 넘어서 구비구비를 지나가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설이 길어졌다. 衆人皆醉 我獨醒 '모든 사람이 취해 있을때 나는 홀로 깨어있다' 소설 추사에서 자주 인용되는 싯구다. 실제로 추사 또한 많이 썼던 글인 듯 싶다. 이 또한 추사선생의 내면의 세계, 또는 삶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추사선생은 단순한 문장가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의 세계였고, 예술의 경지였다. 누군가는 그랬다.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고, '또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추사선생은 정조대에 태어나 순조, 헌종, 철종대까지 살았다. 그러면서 두번의 옥고와 두번의 귀양살이를 겪었다. 생전에 상당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으나 세도정치 핵심인 안동김씨 일파의 정치적 탄압으로 모진 고초를 당한 사람이다. 당대의 깨어있던 인물들이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한 개혁사상에 심취했던 것처럼 추사도 마찬가지였다. 실사구시를 토대로 한 실학사상에 심취했던 인물들이 고초를 당했던 것과 같은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역사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추사선생은 모든 사람들이 취해있는 세상에 홀로 깨어있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추사의 학문세계였고, 예술 세계였고 인생이었다.
추사선생과 뜨거운 교우관계로 묘사되는 해남 대흥사 주지 초의 또한 멋들어진 인물로 묘사된다. 다산 선생과도 깊은 교우 관계를 가졌던 그 역시도 깊은 학문 세계를 추구했던 당대의 삼절로 그려진다. 내가 알기론 초의 또한 멋들어진 사람이다. 종교인이되 종교의 틀을 넘어서 살다간 자유인이다.
일독을 권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잘알지도 못하면 설이 길어졌다.
'衆人皆醉 我獨醒 '모든 사람이 취해 있을때 나는 홀로 깨어있다' 나 또한 이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