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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중

[삶의 창] 나를 칭찬한다/ 박어진  


서기 2010년 한 해 동안 내가 쌓은 업적에 대해 생각한다. 참 훌륭한 점은 건강했다는 거다. 아프지 않으니 대개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다. 이웃과 친구에게는 물론이려니와 가족에게도 웃는 얼굴만한 선물이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 가훈이 바로 ‘함박웃음은 보약 한 첩’이다. 하여튼 실실 웃다 보니 웃을 일이 자꾸 더 생긴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점은 하루하루 재밌게 지내는 능력이다. 흥분할 정도로 특별한 사건은 이미 일어나기 힘든 나이, 근데 일상의 웬만한 일이 그저 즐겁다. 시디 카세트 플레이어를 생일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하는 친정엄마가 있어서 기분이 좋다. 얼큰한 짬뽕 그릇을 사이에 두고 친구랑 먹는 겨울 점심이 행복하다. 통영으로 2박3일 겨울 여행을 가보자고 꼬드겨 댈 친구들이 있으니, 이 또한 즐거운 일! 단순한 뇌 구조 덕분이겠다. 정교한 논리나 사유 능력은 태생적으로 결여되었지만, 저렴하게 행복해지는 능력을 타고났으니 말이다.

겸손은 힘들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나는 칭찬 능력까지 겸비했다. 예리한 비판 능력이 없다 보니 그만 남을 칭찬하는 능력이 대신 솟아난 걸까? 나 자신을 칭찬할 정도니 남에 대해서는 더욱 칭찬할 게 많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훌륭한 점을 반드시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몸을 잘 씻지 않아 겨울에도 땀 냄새로 민폐를 끼치던 동료가 어느날 집에서 손수 만든 초콜릿을 곱게 포장해 안겨줄 때, 어찌 1년간의 땀 냄새를 사면하지 않겠는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꼬며 내 아침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여드름쟁이 고딩 녀석, 어느날 저녁 머리를 꾸벅하며 정중하게 ‘안녕히 가세요’를 외친다. 수능 스트레스에 창백한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던 차, 그 단정한 인사가 고맙고 황송하다. 그가 살아갈 미래가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는 경쟁보다 협조자로 존중하는 세상이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한 해 동안 내 화두는 ‘축복’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만이 아니라 내 눈 안에 들어온 모든 아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의 빛을 쏘아 보내는 일. 고양이들과 참새들, 벚나무들과 개망초꽃들에게도 사랑과 축복을 보내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렇게 잘난 척을 하고 하지만 나는 사실 실수와 잘못투성이 인간이다. 공적 사적 영역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실수와 실패를 여전히 저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성은 짧게 끝내는 게 또 내 스타일이다. 반성과 후회에 몰두하고 있는 한 남을 사랑하고 축복할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위대한 발견이다. 반성과 참회가 줄어드는 한편 남을 미워하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미움의 에너지는 어둡고 탁하다. 이 어두운 에너지가 대기권을 채우고 태양계와 은하계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그건 태초 이래 계속 재순환되고 있는 대기권 안의 공기를 함께 나눠 쓰는 동료 인간들과 생태계 모두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닌가? 해서 나는 미움의 에너지 방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건 지구인으로서의 즐거운 의무니까.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훌륭한 업적은 몇몇 절친들과 내가 작은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작은 골짜기 마을 계획을 충북 옥천이란 낯선 곳에서 현실로 만들어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아기들을 길러내고, 텃밭 농사일을 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며 함께 살아갈 ‘해피 투게더’ 공동체다. 흙집을 짓고 보리밥 점심을 같이 먹고 명상하며 약초를 가꾸는 곳. 당연히 노래와 춤이 있는 명랑마을이 될 것이다. 해마다 조금씩 더 괜찮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나, 이러다 내년에 더 훌륭해지는 것 아닐까?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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