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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 낮고 작은 사람.

눅 9:46-48
46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47 예수께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지난 해 8월 인천의 한 가정에서 10살 된 어린이가 숨진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나트륨 중독이었습니다.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는 죽은 아이에게 계모가 소금밥을 먹이고 학대한 사실을 밝히고 구속하였습니다. 계모는 3살 많은 오빠와 함께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계모는 시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린아이들에게 풀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계모는 10년형을 구형받았습니다. 그제(29일)에는 한진중공업 김금식 조합원이 목을 매 자결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클까, 그리고 그 외로움과 눈물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희망했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세상, 어떤 삶을 원하고 추구하며 기도했을까는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상으로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리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온 인류, 온 생명이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몸과 영혼을 구원 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과 내일을 희망하는 절기가 대림절이 가진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다툼에서 대림절의 깊은 의미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다툼의 이유가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라는 문제였다고 본문은 고발합니다. 제자들이 다툴 때 어떤 말들을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와 함께 세상을 한 번 변화시켜 보겠다는 큰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능과 능력, 실천, 충성, 애국심, 신앙심, 철학, 학벌, 혈통, 재산, 건강, 정치와 경제에 대한 꿈과 기대 등등 크고 높게 보일 수 있는 것들을 열거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단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누가 더 큰 사람이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우월성과 타인의 단점을 들어가며 치열하게 다투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까지 다투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기적과 말씀을 경험하고 들었습니다. 병자들이 회복되고, 귀신들이 쫓겨나고, 바다의 풍랑도 잔잔케 하며,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떡으로 오천명이 넘게 먹고 남는 일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은 모든 세상의 왕보다 크고 뛰어나고, 모든 예언자들보다 큰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귀신들리고 죽어가는 사람들, 모든 생명을 위해 무엇인가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고 선물해 주는 메시야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보아 온 예수는 자신들의 모든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 예수는 로마 황제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제국의 정치를 무너트려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등 삶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세울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도 메시야처럼 크고 높은, 능력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다툼의 원인인 '누가 더 큰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고 던진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폭력적인 제국 로마와 인간의 영혼을 도둑질 해가는 유대종교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가장 위대하고 큰 자이며 메시야 예수의 제자로 적합하다고 나름 생각하고 벌인 다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전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야를 갈망했습니다. 이는 제자들뿐 아니라 로마제국 아래 살고 있던 민중들,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대였고 바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 세상의 모든 왕들을 굴복시키고 자신들의 나라를 강하고 굳건하게 세울 것을 원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강한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간절함은 커졌고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시자 사람들과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희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메시야는 자신들의 상황과 기대에 의해 상상되어지고 현실 되어 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바로 보지 못하고 왜곡되게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어가는 메시야를 받아들일 수 없어 예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유다는 그런 메시야라면 은 30에 팔아 넘기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민족들에게 메시야 사상과 기대가 강하게 자리잡힌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반경부터 약 80년 동의 일입니다. 이 시기는 팔레스티나의 유대인을 지배한 제사장 집안의 마카비 왕조가 그리스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전쟁 할 때입니다. 강력한 제국의 정치와 경제, 군사력 아래서 살던 유대인들은 제국을 물리쳐줄 영웅이 필요했습니다. 마카비 왕조는 제국에 맞서 투쟁하며 유대인들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그 어떤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희망과 열망이 메시야 대망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는 메시야는 혁명가며 정복자, 심판자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제국과 권력자들에게 대한 분노와 증오가 서려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는 메시야의 재림을 간절하게 원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조선말 일본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조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속히 다시 오시기만을 바랬습니다. 메시야가 재림하여 제국 일본의 악행을 심판하고 해방을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조선 기독교인들이 고대하던 예수의 재림은 일본제국과의 평화로운 관계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폭력적인 일본제국의 패망을 강력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 규모 7.9의 대지진이 관동지역에 일어나자 정국의 혼란이 조선인들에게 있다고 선동하여 일본국민들의 분노와 증로를 조선인들에게 풀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학살된 조선인 피해자는 최소 6천 6백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얼마전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에서는 일본인들은 '쇠갈쿠리로 개잡듯이', '주창으로 복부를 찔러', '곡괭이로' 학살을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한 조선 그리스도인은 고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묵시적 메시야, 심판자이며 전능한 메시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칼로 서기를 바라면 피흘림이 있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 피는 항상 억압자들의 피보다 민중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 피를 더 많이 흘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피흘림을 우리의 역사에서 더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랜 독재권력이 뿌리고 키워온 지역감정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악한 정치인과 언론이 지역감정을 조작하고 이용해 국민들을 사상(생각)학살을 합니다. 결국 피흘리고 쓰러지는 건 온 나라의 국민들입니다. 여기엔 어느 누구의 승리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 덕을 보는 악한 정치인들과 나쁜 언론뿐입니다.

오늘도 폭력과 거짓이 난무하는 현실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유대인들과 예수의 제자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처럼 심판하고 정복하고 크고 능력 있는 메시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지 모릅니다.  

"누가 큰 사람인가?"를 놓고 서로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 안의 감춰진 분노와 증오. 이와 같은 마음과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메시야 대망은 강한자들에 의해 흘려진 피와 같은 또 다른 희생의 피를 요구할 뿐입니다. 성경은 크고 강한 메시야를 바라보고 기대하는 건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를 보낸 의미와 뜻과 목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다투는 제자들의 "마음 속"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한 명을 불러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고 하셨습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선포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보고 영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작다고 생각되는 사람, 그 사람을 영접하면 됩니다. 영접이라는 건 섬기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어린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혼자서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 할 정도로 연약하고 작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작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니 그 사람을 영접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에 그 모든 것을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0) 하나님께서 그리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예수를 가장 존귀한 사람으로 여기시고 모든 입으로 그를 "주님"으로 “메시야”로 시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메시야 어떤 예수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 역사에 어떤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 같습니까? 정치는 부정과 부패로 가득하고, 북한은 3대를 이어 30세의 젊은 통치자의 권력 아래 있고, 미국, 중국,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과 자본으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방공식별구역' 놀이를 하며 난리브루스를 추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기아와 전쟁, 분쟁과 생태계 파괴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바라보고 기대할 수 있는 메시야와 그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어 어떤 나라를 이루고 세우기를 바래야 할까요?      

ex) 두 사람 / 같은 교도소에 갇힌 두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바닥만하게 난 창으로 하루 종일 바깥을 내다보며 살았습니다. 한 죄수의 눈에는 늘 견고한 콘크리트 벽만 보였고, 다른 죄수의 눈에는 그 벽 너머에 있는 파란 하늘과 반작이는 별이 보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두 죄수가 형기를 마치고 같은 날 나란히 교도소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갇혀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늘 꿈을 키우던 사람은 그 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자신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콘크리트 벽만 바라보던 사람은 지난번보다 더 큰 죄를 짓고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세상의 온 세상명이 속히 오시기를 바랬던 메시야 예수는 가장 낮고 작은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워 가장 낮고 작은 자리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고 사랑했습니다. 그곳에서 평화를 원했고 정의가 세워지기를 희망하고 요구했습니다. 가장 낮고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 선포하며 그 생명들을 영접하고 섬기라 하셨습니다. 그들 속에 메시야가 있고 메시야의 뜻과 요구가 있으며 메시야가 세우고 이루는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가장 낮고 작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질 때 우리에게 비로소 이 세상을 향해 오셨고 다시 오실 메시야는 보이기 시작하고 바라게 될 것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된 오늘 어떤 생명이 되어, 어느 곳 어느 생명들 사이에서 하늘의 메시야를 대망하시겠습니까? 가장 낮고 작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서 메시야를 찾고 보시며 대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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