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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
잠 24:11-12
11 너는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고, 살해될 사람을 돕는 데 인색하지 말아라. 12 너는 그것이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겠지만,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시겠느냐? 너의 목숨을 지키시는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지 않겠느냐? 그분은 각 사람의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다.

ex) 불행한 남자와 죽음이 신
매일같이 자신의 불행을 탄식만 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입만 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죽음의 신이여! 어째서 내게 빨리 오지 않는가? 이렇게 너를 고대하고 있는데, 빨리 와서 내 불행한 인생을 끝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의 신은 이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인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참 동안 상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지켜보니 이 남자는 정말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입 버릇처럼 “이런 인생은 정말 싫다. 내 소원은 죽음의 신이 와서 내 인생의 막을 한시라도 빨리 내려주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신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의 소원을 빨리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 신은 남자가 어느 때보다 더 큰 소리로 소리친 어느 날 아침, 그 남자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방문을 열망하던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기뻐할까, 기대하며 죽음의 신은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죽음의 신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고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소리쳤습니다. “썩 꺼져라!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죽음의 신은 기가 막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인간이란 이래서 알 수 없는 존재란 말이야.”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죽음의 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마음에 응원을 보내주고 함께 해 주며 살기란 쉽지 않다는 말 일 겁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우리 민족은 새 해 첫 날 설날이면 어른들을 찾아가 세배하고 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축복해 주고, 젊은이들은 어르신들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습니다. 서로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알아주고 염원해 주는 좋은 풍속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어야 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주님을 묵상하고 우리 또한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헤아림을 받으려거든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심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용서의 법칙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자는 교훈하기를 “너는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고, 살해될 사람을 돕는 데 인색하지 말아라.”(11절)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 ‘살해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현장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의 자리로 내 몰리고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자본은 신이 되어 경쟁에서 뒤쳐진 인생은 낙오되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규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자본의 거대한 힘은 전쟁과 학살을 일으키며 사람들을 공포와 두려움에 몰아넣어 버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하수인이 되어 동료들과 이웃들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자본에게 철저하게 짓밟혀 죽어 있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잔인하게 억압당하고 차별당하는, 전쟁의 피해 자들과, 해고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규직들 또한 ‘죽을 자리에 끌려가는 사람’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자신도 그런 자리에 서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자리에 끌려가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연대하거나 회피와 방관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대를 주저하거나 모른 척 하는 건 자본의 신이 걸어놓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너는 그것이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겠지만,” 이라고 책망하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죄의 힘이 두렵고 불안을 느낀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 나눔을 가지고 더 큰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며 함께 하고 연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마음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습니다.

맹자는 이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어떤 일에 공감하지 않는 마음은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이는 내 알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미련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없는 것은 불에 던져질 나무토막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시겠느냐?”(12절)고 묻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목숨의 주인이 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자리에 끌려가는 사람’ ‘살해될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한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 속에서 자신의 연약한 자녀들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다. 그 안에 얼마나 큰 두려움이 있는지도 아십니다.

하지만 지혜자는 “너의 목숨을 지키시는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지 않겠느냐? (12절)고 교훈합니다. 지혜자는 연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 자본의 신에게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 주시고 생명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오늘 본문 끝에 교훈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실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려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섬기고 나누는지 아시고 그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자리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하는 우리의 행위에 결코 모른체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피조물들을 건져내고 돌보는데 함께하고 연대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부터 온 땅 끝까지 이르러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EX) 독실한 크리스천인 한 부인이 있는 한 가정에 대한 유머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부인은 틈만 나면 남편과 아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했지만, 두 사람은 부인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남편은 무신론자였고, 아들은 아직 신앙이 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부인은 억지로 남편과 아들을 교회로 이끌고 나가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그러자 남편은 부인을 따라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장인어른!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이어 아들도 얼떨결에 아버지를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사랑하는 외할아버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하였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닌 부인이 남편과 아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갔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장인어른으로, 외할아버지로 부르는 가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가족이 부른 하나님은 부인의 하나님만으로 불린 것입니다. 이 가족이 서로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 주었더라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더 잘 이해하고 나누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많은 기도와 사랑, 섬김, 희생을 요구합니다.

ex) 페이스북 친구 중 한 권사님이 계시는데 자신이 손주들을 16년 동안 애지중지하며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대차이로 인해 대화가 어렵고 자신이 소외된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손주들이 할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페이스북에 손주들에게 서운한 마음에 락커 가수인 정동하를 더 이뻐 해 줄 것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행여 부족함이 있어 모든 사람의 마음, 특히 고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요일 3:20] 분이 시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 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작아 보일지라도 그 마음 깊은 곳의 사랑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부족하고 작은 정성이라고 소홀히 하지 마시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도움을 주고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설을 맞아 함께 모이는 가족들, 친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울 마음을 헤아려 주듯이 더 깊이 있고 진실하게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철탑에 올라간 노동자들, 성당 종탑에 올라간 노동자들, 자본과 권력에 눈물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하는 그 마음과 헤아림, 연대와 실천이 부활의 생명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더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 이 사회와 민족의 역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역사가 충만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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