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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는 사랑
요나 4:1-11
1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2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책망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ㄱ,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6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 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7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8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지난 3월 2일 패션 명가 ‘크리스티안 디오르’의 세계적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히틀러를 찬양하였다 하여 자신이 속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갈리아노는 어느 한 식당에서 만취하여 유대인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그가 히틀러를 찬양하는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변명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 중 600만 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독재자입니다. 히틀러의 폭력에 가족과 민족을 잃은 유태인들과 수많은 전쟁피해자들의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학살자를 향한 분노는 결코 사라지면 안 되는 거룩한 분노라 생각됩니다. 그 거룩한 분노가 갈리아노의 히틀러 찬양을 가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갈리아노가 퇴출당하는 모습을 보고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뛰어 넘어 사랑으로 가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자신과 가족, 나라와 민족을 향해 엄청난 피해를 주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사랑이 결여된 분노와 증오가 계속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면 결론은 피로 얼룩지는 참으로 끔찍한 세상을 상상하게 됩니다.

‘마지막 한걸음까지’ 라는 영화는 나름 느낌을 말하자면 분노를 넘어 사랑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독일인이며 군인이었던 클레멘스 포렐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전쟁 당시 소련군의 포로가 된 포렐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4년을 갇혀 있다가 탈출에 성공해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탈출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카마네프가 그의 뒤를 쫓고, 도중에 만난 사람들의 위협에 처하기도 하고, 스파이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탈출 과정 중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한 도시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포렐의 여권을 만들어 주고 안전하게 탈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유태인이었다는 겁니다. 포렐을 도와준 유태인은 자신의 가족이 독일군에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를 고발하여 복수 할 수도 있었지만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였습니다. 포렐을 도와준 유대인은 자신의 타당한 분노를 뛰어 넘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니느웨 도시를 향해 회개의 선포를 주문 받은 요나 선지자의 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찾아가 회개할 것을 촉구하라는 말씀을 듣고 반대쪽인 스페인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이유가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절)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뢴 이 내용은 그가 가진 니느웨를 향한 분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는 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요나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한없이 분이시고,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향해 빛나는 태양처럼 모든 민족 누구게나 언제나 사랑과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고 있는 요나의 신앙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앗시리아 제국으로부터 자신과 민족이 겪은 수치와 폭력, 억압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앗시리아는 제국으로 점령한 나라에게 많은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제국의 침략으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학살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약탈은 요나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1910년 우리 민족의 선열들은 일제의 침략과 억압을 받을 시기, 굴욕적인 외교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서 항변하였는데, 요나의 분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민족에게 행한 앗시리아의 만행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느끼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앗시리아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진노를 피할 것을 바라시는 분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느누구나 사랑과 자비로 대하는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자신이 겪는 현실과 타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니느웨로 가려다 스페인으로 피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하였고, 겁먹은 선원들로 하여금 그를 바다에 빠치게 한 후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있게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던 3일은 요나 자신과 민족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과거의 허물과 죄로 얼룩진 자신의 모습, 니느웨 사람들과 다름 아닌 자신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고기 뱃속 삼일은 요나에게 성숙 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전할 것을 약속하고 구원은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약속을 받으시고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뭍에 뱉어내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듯 했지만, 원수 니느웨를 보자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어쨋거나 요나는 하나님과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하나님께서 명한 말씀대로 큰 성읍 니느웨에서 하룻길을 걸으며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크게 외쳤습니다.(3:5) 제국 앗시리아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풀리지 않는 요나의 분노가 남아 있는 말씀입니다. 원래 니느웨 성읍은 사흘 길을 걸어야 다 둘러 볼 수 있는 큰 성읍입니다.(3:4) 그러나 요나는 하루 길 만을 걸으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할 것을 전하였습니다.

요나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알면서 자신의 삶에서 온전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요나의 속 좁은 마음은 하나님 앞에 찾아와 용서를 빌고  기도하며 다짐 하지만 쉽게 무너져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3일을 걸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는 요나의 하루 길 행보를 보면서 온전히 예수를 닮아 살아간다 하면서 약간의 흉내정도 내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작은 물줄기와 같은 실천에도 불구하고 강과 같은 큰 물줄기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요나의 실천에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들의 폭력을 내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외침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게까지 이르러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왕에게까지 전해져 임금은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습니다. 앗시리아의 임금은 칙령을 내렸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3:8)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가장 분노하고 되갚아 주고 싶은 니느웨의 악한 죄는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국 니느웨를 벌할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돌이킬 것을 기대하시고 자신을 보내니 요나 자신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을 갖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작게나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품고 실천하였을 때 물방울이 폭포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포악하고 폭력적인 제국 니느웨가 자신들의 나쁜 길에서 돌이켰던 것입니다. 요나가 예상 했던 대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요나가 알던 대로 명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의무적인 사랑을 뛰어 넘지 못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깨우치심과 인도하심이 있어 원수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그들이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든 말든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졌던 하나님이 심판의 불이 내려 니느웨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길 내심 기대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회개한 니느웨에게 심판을 내리지 아니한 하나님의 일이 굉장히 못마땅하였고, 화가 났습니다. 요나의 화내는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4:3) 물으시며 그를 책망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과 야고보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던 사마리아 마을이 있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이를 괘씸히 여기고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시고 꾸짖으셨습니다.(눅9:54) 자신들을 거부하고 억압하는 이들을 향해 살기를 드리우는 요나와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은 예수께서 보실 때는 폭력에 맞선 또 다른 폭력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요나는 자신과 민족이 받은 고통과 멸시, 아픔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진리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매여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못마땅하고 화가 난 모습으로 니느웨 성읍을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요나는 그곳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았는데, 니느웨 성읍이 어찌되나 지켜볼 심산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의 집나간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나오는 큰 아들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방탕하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맞아 준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큰 아들의 모습은 요나의 모습뿐 아니라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돌이켜 죄악을 떠난 사람을 언제든지 받아주고 용서해 주시지만 우리는 상처 받은 마음들이 쉽게 치유되지 않고 정죄와 다툼을 일으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비와 햇빛을 동일하게 주시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적이 사람에게 더 많은 친절과 호의를 베풀며 삽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에게 유익된 사람, 자신에게 무엇인가 주고, 의지가 될 만한 사람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낮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불친절하고 퉁명하게 대하며 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초막 옆에 박 넝쿨을 마련하여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 그늘로 인해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께서는 벌레 한 마리가 박 넝쿨을 갉아 먹게 하였습니다. 벌레 먹은 박 넝쿨은 금방 시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해가 뜨자 뜨거운 동풍을 요나에게 불게 했고, 햇볕이 그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말하며 요나는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말하며 하나님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지금 요나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면서 외면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라는 순간부터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쁜 길을 돌이키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크신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민족을 죽이고 조공을 받아가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사라져주기만을 바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사랑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고 사랑하려 하지 않는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 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우지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0-11)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그렇게 싫어하고 분해하는 니느웨를 언급하시면서 그에게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잠시 시원케 해 준 박 넝쿨을 보고 사랑을 느꼈던 요나의 마음에 하나님 자신이 니느웨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느끼는 사랑을 호소하셨습니다.

요나는 사랑이 없는 폭력적인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민족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강렬하게 있었던 선지자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했던 사마리아를 향해 불을 내릴까요 묻던 제자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향한 열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하늘의 심판의 불을 갈망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편협하고 빗나간 열정과 사랑은 꾸지람을 들을 뿐 우주적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사랑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자신의 삶을 돌이키려 애쓰고 있는 네 원수 니느웨를 사랑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나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요. 아마 식물이며, 동물이며, 사람까지 모든 생명을 낳고 기르시고 아끼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요나에게 온 몸으로 다가 와 느껴졌을 겁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물음에서 끝을 맺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어느 동화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결론내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사랑에서 머물지 말고  大慈大悲(덧말:대자대비)하신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살 것을 주문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는 아픔이 있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와 같습니다. 원수가 눈앞에 있고, 고통이 느껴지는 현실이 있습니다.

직장과 학교, 넓게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현실에서 우리는 어렸을 적 땅따먹기 게임처럼 한 뼘 한 뼘 자신의 사랑을 넓혀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기도의 골방에 자주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순간 순간 하나 하나에 진실함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아주 작은 생명까지 배려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따르고자 한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아무리 고통스럽고 이해 못할 현실이 눈앞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대자대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세상엔 평화와 사랑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大慈大悲(덧말:대자대비)를 닮아 나를 넘는 사랑을 하여 개인의 삶과 공동체, 이 민족, 온 생명계와 더불어 충만한 사랑을 나누며 사는 한 주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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