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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성문밖행전!
행2: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헬렌 니어링은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55년을 동거동락한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죽음은 시작을 여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문들은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다시 돌아올 희망과 포부를 않고, 또 어떤 문은 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닫히고 만다. ‘더 이상은 안돼’ 하며, 어떤 문들은 ‘괜찮았어, 하지만 끝난 일이야’ 하며 후회 속에서 조용히 닫힌다. 또 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헬렌은 남편 스코트의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성찰했습니다. 이러한 성찰은 죽은 자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산자들의 성찰은 언제나 새롭고 영원한 세계로의 여행입니다. 이는 곧 함께 했던 사람과의 이별 이후 산자가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 대한 고민과 성찰,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직계제자들의 삶을 그린 성경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유대 권력자들의 힘과 폭력이 두려웠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모든 두려움을 이길 용기와 힘을 얻을 만하지만 자신들에게 드리운 두렵고 떨리는 현실 앞에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굉장히 모험적인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폭력을 피해 갈릴리로 돌아가 예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 힘을 얻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갈릴리로 피했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건 기도뿐이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참혹한 현실이었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자신들에게 드리워진 현실을 넘어서기가 힘에 벅찼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경험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하는 폭력은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한 고통과 절망을 안겨줍니다. 개인의 생활 속에서 겪는 고난 또한 힘에 겨울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바라보지만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가 불가능해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아프카니스탄에서 8살 아이가 폭탄을 몸에 두른 채 경찰차 뒤에 서성거리며 두려움에 떨다 기폭장치를 누르지 못하고 경찰에 발견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건강의 악화로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음에 던지는 소식을 간간히 듣곤 합니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어린 생명들을 폭력의 현장으로 내모는 모습과 삶의 밑바닥에 닿아 있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선택을 접할 때면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이러한 인간들을 짐승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소설 속 조르바는 크레타라는 지역에서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행해진 인간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몸서리를 쳤습니다.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자신이 왜 그렇게 했는지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소설 속 조르바에게 인간은 어느 순간 포악한 짐승에 불과해 보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을 넘어서기 위해 타인의 절망을 끝없이 생산해 내는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인간의 연약하고 두려운 모습을 볼 때면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하고 계시며 어디에 계시는가 묻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볼 때면 나 또한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자신들에게 닥친 정치경제적인 현실의 벽을 넘어 서기 위해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성령은 불의 혀처럼 모든 사람들 머리 위에 임재 하였고 그들은 새로운 힘과 용기, 도전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일어섰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을 향한 힘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로마와 유대 권력의 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이길 수 없다는 확신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어두운 권력의 힘에 의해 처형된 예수의 죽음은 부활로 나가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문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께서 약속한 성령이 임재한 후 산자들의 삶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승화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와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삶의 모든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는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압제와 유대종교의 핍박에도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기억할 수 있었고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코 포기할 수도 포기되어서도 안 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와 개인이 겪었던 절망을 넘어 설 수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현실을 넘어 부활 생명의 삶으로 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 하였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은 전해 줍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쪽 빰을 맞으면 한 쪽 빰도 갖다 대 주어라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철저한 비폭력 사랑,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줄 수 있는 자기부인과 내어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대제사장의 병사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쳤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삶은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거대한 폭력을 회피하며 정의를 외면한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도 폭력 앞에 당당히 맞서 서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십자가와 부활로 풀어냈고 그들과 함께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몰두한 그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미친 권력과 제국 로마의 폭력적인 문화에 비폭력으로 맞설 수 있었고 교회를 더 든든하게 세워갈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었고 유지되고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오랜 역사의 연장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몰두 하고 나아갈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초대 예수사랑공동체에게 그러하셨듯이 오늘 불의하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성문밖예수사랑공동체가 예수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겁니다.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예수사랑공동체는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귄다는 건 자신을 부정하고 타인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모든 사람을 주님 대하듯 만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일은 예수님을 만나 듯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만남과 모임은 서로의 필요를 채울 줄 수 있습니다. 초대 예수사랑공동체는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않고 서로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들의 공동생활은 인류의 역사에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계부채가 천조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현재 언제 터질지 모를 경제생활의 위험한 사선에 서 있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운다는 말로 금융경제는 부채인간을 만들어 내고 수많은 사람들을 금융노예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연약한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빚의 탕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하듯 모든 부채를 탕감하는 위대한 혁명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으면 됩니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서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공공복지라는 것을 깨달고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삶의 부분에서 최대한 차별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정부가 그렇게 움직이도록 해야 하고 우리 성문밖예수사랑공동체의 지체들의 필요를 서로 돌보며 나가야 합니다. 이는 서로 모여 빵을 떼는 일과 같습니다. 빵을 뗀다는 건 성찬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더 깊은 의미와 목적을 찾는다면 서로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염려해 주고 나누며 돌봐주는 일입니다. 폭포는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듯 국가공동체의 나갈 방향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성문밖공동체의 모임과 방향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삶이 기록되고 나누어질 수 있었던 뿌리는 그들이 모여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억압과 핍박이 있을 때 고통스럽고 가난한 삶의 현장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였을 때 성령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성령으로 시작된 초대 예수사랑공동체는 기도하며 모였고 기도하며 흩어졌습니다. 성문밖예수사랑공동체는 성령에 의해 모였고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정의의 이룸은 시작되고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힘쓰는 성문밖 예수사랑공동체’가 되어 그 안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담고 이루어 살아야 합니다. 모일 때마다 사귀는 일에 열심하고 빵을 떼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할 때 성령의 역사는 더 풍성하게 우리 안에 나타나고 우리의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의 가르침과 삶을 가르켜 ‘사도행전’이라 부르고 세계교회의 방향을 이끌었듯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임과 삶의 내용은 ‘성문밖행전’이 되어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회자되며 어둡고 거친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산자들과 이별을 고한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전망과 모험, 도전과 용기,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줄 것입니다. ‘성문밖행전’을 지금 이 순간부터 써내려가는 귀한 삶이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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