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74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데살로니가후서3:2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안녕하십니까? 김희룡 목사입니다. 대개 아시는 것처럼 저는 성문밖 교회에 새롭게 청빙된 담임목사입니다.

평소의 저라면 주일 예배 설교단에서 가급적이면 개인적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단지 설교자로만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성문밖 교회의 새로운 가족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밖 교회의 담임으로 청빙된 이후 오늘까지 제 마음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간략히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꼭 불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청빙이후 일어난 일 하나,

제가  성문밖 교회에 청빙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매우 기뻤고 또 놀랐습니다. 청빙소식은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처럼 제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청빙된 성문밖 교회로 가기 전 대략 2주의 시간이 남았는데, 뭔가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대략  3가지를 머리 속에 떠올린 것 같습니다. 첫째,  기도원에 가서 앞으로의 목회를 기도로써 준비한다. 둘째, 성경을 급하게 한 번 통독하고 간다. 셋째, 교양이 중요한 시대니까 고전을 좀 읽어서 교양을 충전한다. 잠시 이처럼 분주한 생각들에 사로잡혔으나 결과적으로 하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마음은 너무나 분주했고 들떠 있었으므로 조용히 앉아서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기도와 독서는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 시작한 것이 팔굽혀펴기와 다리 찢기였습니다. 정말 지칠 때까지 열심히 푸시 업을 하고 다리를 찢었습니다. 그리하여 2주 만에 손바닥 푸시 업은 쉬지 않고 60개 이상, 손가락 푸시 업은 20개 이상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리 찢기도 국가대표 손연재와 비교할 수는 없으나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도대체 푸시 업과 다리 찢기가 목회에 무슨 도움이 될까 때때로 의심과 회의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저는 그거라도 해야 했습니다. 목회 시작을 앞두고 뭔지 모를 에너지는 뿜어져 나오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몸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2주의 시간이 흘렀고 저는 41일부터 교회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산선의 사무실을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 3일은 거의 종일 가구를 옮기고 자료를 정리하고 버릴 물건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많은 체력이 요구되더군요. 제가 의심과 회의 속에서도 열심히 훈련한 푸시 업과 다리 찢기가 바로 이 순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빙이후 일어난 일 둘,

저는 제가 청빙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어째서 내가 청빙된 것일까 궁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영위원 집사님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어찌하여 제가 선택된 것인지 살짝 물었습니다. 저는 성문밖 교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나에게 주어질 과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사님들이 처음 내놓은 대답은 안 알려 준다였습니다. 안 알려 준다 하셔서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교회와 목사가 청빙이란 절차를 통해 맺게 되는 관계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진행되었고 마침내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맺었던 관계에 어떤 대답이 있으리란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듯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맺은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닌 친구관계였음을 새롭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15,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맺은 관계가 주종관계가 아닌 친구관계였음을 기억해내자 저는 널리 알려진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저는 이 경구를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제자들과 친구관계를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해 보았습니다. “有朋이 自天國來면 不亦樂乎!” 벗이 있어 하늘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그러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늘로부터 우리를 찾아온 친구였구나! 하는 상념에 빠지게도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또한 스승으로 섬기는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과 다른 어떤 관계가 아닌 친구관계를 맺으셨다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친구관계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문밖 교회가 진행한 청빙절차는 먼 곳에 있는 친구를 부르기 위한 절차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문밖 교회의 청빙을 받고 이 자리에 서게 된 저는 친구들의 부름을 받고 먼 곳으로부터 불원천리 달려온 친구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살짝 덧붙이는 말)

제가 독일에 10년을 살면서 두 번 쯤 한국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서울에 가면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대전에 가면 대전에 있는 친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모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너 때문에 모였다." 모두가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 사느라 바빠서 몇 년째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살다가 한 친구가 멀리 독일에서 찾아오자 그것을 계기로 모이게 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문밖 교회 교우들께서도 그동안 격조했던 교우들이 있다면, 이참에 연락 한 번 넣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청빙이란 절차를 거쳐 먼 곳에서 한 친구가 찾아왔노라고 저를 핑계로 말입니다.

 

청빙이후 일어난 일 셋,

저는 청빙이후 성문밖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지난 일주일 동안 성문밖 교회의 30년 역사를(1977-2007) 기록한 "그 길의 사람들"을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주로 교회와 집을 오가는 지하철에서 읽었습니다. 밑줄을 그어가며 시험공부를 하듯 읽었습니다. 때가 되면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전교인을 대상으로 일제고사나 도전! 골든벨을 실시하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는 주책없이 몇 번이나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서울 시민 수백만이 애용하는 지하철 안에서 말입니다. 책의 어느 부분에서 제가 그런 주책을 부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수학을 못하기 때문에 숫자나 도표를 매우 싫어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를 울린 것은 온통 숫자와 도표로 구성된 부분, 책의 제 4장이었습니다.

 

책의 4장을 가득 채운 도표와 숫자는 성문밖 교인들이 현재의 성문밖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미래의 성문밖 교회에 대해서 또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성문밖 교인들은 우리의 신앙이 성문밖의 사람들, 그리고 소외된 현장을 지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문밖 교회의 미래가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의 정체를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성문밖 교회는 올바른 신앙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이렇게 언제나 소수에 불과한가?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신앙의 가치는 옳은 것이긴 하나 세상을 설득할 능력은 없는 것인가? 세상은 우리의 선포를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우리의 신앙적 지향이 과연 우리의 자녀에게 그리고 미래 성문밖 교회에 지속적으로 전달될 수 있겠는가? 하는 탄식처럼 들렸습니다.


역시 저 자신이 지향하는 신앙의 가치를 확신하면서도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 저의 그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에 대해 늘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문밖 교우들이 느끼는 확신과 불안의 양가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너무 깊이 감정이입이 되었던 탓에 몇 번이나 울컥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의 이런 말을 기억해냈습니다. “실패했으나 생명은 남아 있고 성공했더라도 생명이 없는 경우도 있으며, 끊임없이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시도 되어야 하는 가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32절은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저는 이 말씀을 "믿음은 소수자 또는 비주류의 길이다"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소수자로서 , 비주류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쓸쓸함과 슬픔을 짝하여 살아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대단히 불행한 또는 버림받은 운명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쓸쓸함과 슬픔은 불행한 운명, 버려진 운명임을 증명하는 표지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삶이야말로 가난하고 외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도 누가복음 958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가 예수님이 가난했고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예수님의 삶이 불행한 운명, 버려진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가난과 슬픔이 불행한 운명을 의미하는 표지가 아니라는 것, 가난과 슬픔은 오히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들의 역설적인 표지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행복론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3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자들는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6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받았던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기적을 베풀어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수천 명을 먹였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모습으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순간, 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형집행인,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비참해진 순간이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된 순간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성문밖 교우 여러분, 우리 성문밖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의 가치가 때때로 더욱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해 보일지라도 실망하거나 위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소수자로서, 비주류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버림받은 운명의 시그널Signal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스티그마Stigma입니다.

 

말은 다 좋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어느 누가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운명을 하나님께 사랑 받는 증거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혹시 그렇게 물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또한 성령은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을 불행한 운명의 시그널이 아닌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스티그마임을 발견토록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요동할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또한 예수님의 가난하고 외로웠던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행복론이란 메시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믿음의 길이 소수자의 길이며 비주류의 길임을 절감하며 실망하고 위축되는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겪고 있는 성문밖 교회 다른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메시지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그리하여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소수자, 비주류의 길, 믿음의 길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며,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여, 당신은 또한 진리의 영이시니 우리의 눈을 열어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흔이라는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나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요동하지만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이끌리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오직 믿음으로 순종으로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Title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 ›
/ 12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