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자료
2014.07.07 23:26

2014.07.06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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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고전2, 6-9

설교제목: 사랑받지 못한 십자가

설교 후 찬송: 149(주 달려 죽은 십자가)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받지 못하였고 또한 사랑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자유를 제공하여 준다.”

 

십자가는 본래 수치와 굴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25절에서도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외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와 같은 열강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린 식민의 역사 속에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 개입하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유대인들이 암담한 현실을 견뎌내는 근원적 힘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가 오면 현재의 모든 암담함을 걷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또한 스스로를 지혜로운 민족이라 믿었던 헬라인들은  지혜를 통해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의 학파를 세운 지혜로운 사람들을 단순히 선생이라 부르지 않았고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 소테르soter라고 불렀습니다.

 

이렇듯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존재였으며 또한 헬라인들에게 구원자는 초월적인 지혜를 전해주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낯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무력하게 죽은 나사렛 예수가 새로운 시대를 연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수치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니! 하나님께서 죽으셨다니! 이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식은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소리, 실없는 소리라는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신의 지혜가 세상의 폭력에게 패배하다니! 그것은 참된 지혜가 아니라고, 세상을 초월하는 지혜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23절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작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던 당대의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십자가는 오늘 우리에게는 사랑받고 있는가?

 

저의 옛날 경험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학교에 가기 전, 저는 조그만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예쁜 딸을 키우던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딸도 예쁘지만 아들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분의 바람대로 어느 날 그분은 임신을 하셨고, 임신한 몸으로 기도원을 찾아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잘 모릅니다. 아마도 태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에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그 분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태아의 성별을 가르쳐주지 않을 때였나 봅니다. 그분은 기쁜 마음에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아마도 꽤 많이.

 

그분은 과연 아들을 낳았을까요? 그랬다면 얘깃거리가 될 수 없었겠지요? 그분은 떡두꺼비같은 딸을 낳으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실망하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분은 그 뒤로도 별일 없었다는 듯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나는 안타까웠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앞으론 그런 사기꾼에게 속지 마세요!”하고 이야기했어야 했을까요? 제가 그렇게 말해주면 다시는 속지 않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상, 신앙에 대한 개념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나 신앙을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같은 일은 계속 형태를 달리해서 반복되지 않을까요?

 

불트만이란 신학자는 미신이란 자기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신앙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신은 특정한 종교와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교적 태도와 관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우리도 신앙과 미신 사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라도 허무한 미신에 떨어질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점집에 있는가? 아니면 교회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미신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신앙으로 또는 미신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디에서 발견하려고 하는가 하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들도 신앙과 미신의 경계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신앙고백, 즉 "당신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들으신 이후 비밀로 감춰 두었던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 고난과 죽음의 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말했으나 제자들만은 스승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했기 때문에 감추어온 비밀을 말해도 좋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기대를 보기 좋게 저버립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께서  영광의 길을 통해 영광스런 자리로 들어가실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그리하여 누가 예수님 다음의 권세를 누려야 할 것인가, 누가 그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가 그들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면서도 그들 역시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자신들의 바람을 채워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엇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미신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미신적 바람을 배신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자기를 채우는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비워, 온 존재를 내어주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미신이 되는 순간,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기대를 저버리는 슬픈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미신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온저히 계시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 것임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오늘 우리도 실망시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욕망에 따라 십자가가 아닌 전혀 다른 구원을 상상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를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통치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대의 통치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 시대의 통치자들에게도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혜는 보이지 않는것 같습니다.


또한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고 귀에도 들리지 않았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많은 교인들에게도 이 지혜는 들리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듯 합니다. 오로지 내 문제에 개입하여 해결해 주실 기적과 지혜의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쉽게 미신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존재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경배하고 믿는 미신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그의 책 "저항과 복종"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하나님 없이 산다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님이 말하는 "하나님 없이"에서 하나님이란 "해결사"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문제의 해결, 자기 불안의 위로를 위해 요청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신앙인이 곧 성숙한 신앙인이라는 것이 본회퍼 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12장 6절에서도 십자가의 지혜는 "성숙한 자들"에게나 말할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성문밖 교우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신이 아닌 진짜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들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참된 지혜로써 경배할 가치가 없는 거짓된 종교성에서 벗어나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과만 교제하는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누구에게도 어느 시대에도 사랑받지 못한 십자가를 사랑하는 성문밖 식구들이 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기도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받지 못하였고 사랑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성찰하고 묵상하게 해주십시오.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오직 사랑을 위한 무력해 지시고 어리석어 지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게서 나타났음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통한 아름다운 교제가 거리낌과 어리석음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찾기로 결단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의 삶 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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