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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마태복음 1624-25

설교제목: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설교 후 찬양: 315

 

신학교 시절, 어떤 교수님의 특강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자기소개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십년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십년 이상 기도하지 않았고, 또한 십년 이상 성경 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묻는다면, 그분은 주저 없어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교수님은 형식적인 교회출석, 성경읽기, 기도와 외적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란 타이를 벗어버리는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타이란 문자 그대로 말하면 무언가를 얽어매는 줄을 뜻합니다. 그러나 속뜻을 살핀다면, 타이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불합리한, 부조리한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타이를 벗어버리는 사람이란, 인간을 억압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모든 권위를 부정할 줄 아는, 그 같은 권위에 대하여 아니요!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며 또한 그러한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이다, 라는 것이 그분의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에 공감을 느끼며 강연 말미에 질문도 하나 드렸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타이를 벗어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타이들에 종교도 포함되는가 하는 것이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당연하다고, 종교 역시 불합리한, 부조리한 권위가 되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타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그 타이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우리가 속한 기독교조차도 인간을 억압하는 타이가 될 수 있고, 그렇다면 벗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질문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복음이 되는 순간은 언제이며 또한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타이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지 더 물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의 저는 기독교가 자유를 주는 복음이 되기도 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타이가 되기도 하는 그 기준은 십자가라고 믿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메시지가 긍정되는 한 기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복음이 될 것이고 십자가의 메시지가 부정된다면 기독교는 갖가지 형식적 종교행위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타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여러모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사도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 전체가 곧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고전1, 18절에서 십자가는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22-23)”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전2, 2절에서 보다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루터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바울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렸던 그분의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부활의 메시지에서조차 십자가를 강조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부활을 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깊이를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구원이 어느 곳, 어느 깊이에서 이루어진 사건인지를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말한다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내려가시고 낮아지셔야 했던 그 가난과 수치와 모욕과 고통의 깊이가 감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 깊이가 감추어지면 우리가 얻은 구원은 값싼 은혜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낮아짐의 깊이는 곧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낮아짐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하는 그것이 관념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난 계시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야말로 기독교의 증언이 복음이 되도록 만드는 결정적 요소이며 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어떤 사람을 기독교인이 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라는 것, 이것이 바울의 증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교회의 선포는 언제나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전통을 따르는 독일교회 건축을 보면, 십자가가 제단의 중앙에 있고 그 앞을 비운채 설교단을 왼쪽 상단에 위치하게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도 십자가를 보며 말씀을 선포하고 교인도 십자가를 보며 말씀을 듣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십자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며 찾으리라. 명령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글자 그대로 순교를 각오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종종 가장 잔인하게 고통당하며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다릅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 그 자체 때문에 박해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고난과 박해 받을 만한 거리도 없는 번영 일변도의 기독교를 비판할지언정,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관심과 존경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24절의 말씀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지셨으니, 그를 따르는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십자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의미를 드러내는 십자가입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원형이요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원형으로부터 파생된, 원형의 의미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는 모형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묵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공의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메시지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있는 자기 부인의 요소입니다. 여기서 자기란 타락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랑, 성공, 명예, 칭찬, 신뢰, 인정, 인기를 탐하는 이기적 자신입니다. 그리고 굴욕, 멸시, 비난, 모략, 오해, 조롱, 배신등과 같은 것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어 하는 나약한 자기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장면을 보면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자, 나서서 주님을 말리며 그리하지 마시라고 막아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성공이 눈앞에 있는데 그걸 버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이러한 사람의 일” “인간의 자기 애, 성공을 통해 자기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의 실현"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리 수 없다는 메시지 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실패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견뎌낼 수 있고(긍정할 수 있고) 우리의 노력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허무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그 모든 실패를 유익한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의 십자가는 그 어떤 폭력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공권력과 유대의 종교권력은 예수의 육신을 짓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의 아버지, 하나님, 그분에 대한 신뢰로부터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이것을 믿는 모든 인간은 그들이 비록 허약하고 그들의 삶이 불확실하기는 하나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을 예수로부터,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지키고 배반하지 않으려 했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고유한 혁명이며, 모든 지배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이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로마의 황제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힘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로마황제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양심의 자유였습니다.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이 거대한 물결처럼 사람들을 휘몰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모든 강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깨져 버렸다는 메시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성공으로부터 실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실패와 몰락으로부터 성취되었다는 메시지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표면적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치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약 우리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하고 우리의 모든 실패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여 우리의 모든 실패를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 가는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현재 우리의 사회는 허약하고 불안한 미래에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심이라도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공권력이나 종교권력도 예수를 그의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지 못했으며 그럼으로써 양심을 배반하지 않을 영원한 자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주어졌다는 메시지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비록 나약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되었음을 믿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어쩌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의 양심을 소중히 지켜간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늘 주어진 본문의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현실보다 들리는 말씀을 더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톡 까놓고 말해서, 보이는 현실을 따라가며 살 때, 여러분의 삶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셨나요? 그렇지 않다면 이제는 들리는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의지해서 살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그러한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기도

주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성공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실패에서 의미를 찾아 유익으로 바꾸어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또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며 그 연합이 결코 끊어지지 않음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을 소중히 지켜가게 하옵소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통한 아름다운 교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집중하며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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