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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20:08

2014.07.20 주일설교 "하나님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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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하나님의 백성

설교본문: 신명기 76-7

설교 후 찬송: 620, 여기에 모인 우리

 

1. 이스라엘의 재 건국, 역사의 기적, 기적의 역사

1948514일 텔아비브에서 유대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요, 역사의 기적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견뎌낸 고난의 세월을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기원 70(지금으로부터 1944년 전) 로마의 티투스에게 점령된 이후 다시는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려 2000년 가까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 세계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한 민족이 독립된 나라를 구성하지 못하고 대략 200년의 세월을 지나게 되면 민족 자체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민족이 갖는 고유한 언어와 문화 즉 민족의 정체성이 200년이면 사라지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200년은 민족의 존립을 결정하는 유효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유효기간의 무려 10배에 가까운 세월을 나라 없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긴 세월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건국도 이루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역사가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적의 역사, 역사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2. 기적의 역사를 이룬 원동력, 선민신앙

이러한 기적의 역사, 역사의 기적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역사를 가능하게 했는가? 기적의 역사를 이룬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스라엘의 선민신앙이었습니다. 즉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신앙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선민신앙의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 중 하나입니다. 신명기 76절입니다. 개역성경으로 읽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오늘의 이 본문 외에도 구약성경에는 특별히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내용의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선민신앙은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어떤 시련과 고난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록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세계 곳곳에서 늘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 보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그러한 삶의 자세는 그들이 사는 땅에서 그들을 별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때로 그들의 철저한 태도는 그들을 혐오와 핍박의 대상이 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닥칠수록 그들은 오히려 더욱 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신앙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기적의 역사, 역사의 기적인, 이스라엘의 건국을 1900년 만에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3. 기적의 역사를 이룬 원동력이었던 하나님, 그분의 이름은?

그렇다면 이 놀라운 역사의 진정한 배후,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그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직접 가르쳐 주시는 장면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314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의 노예 히브리인들의 지도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어느 날 양 무리를 치다가 호렙산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장면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장면을 보려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두려워하면서 얼굴을 가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그들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내겠다, 그러니 모세 네가 가서 나 하나님의 말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거절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런 일을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재차 모세에게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히브리인들에게 가면 그들이 너를 보낸 그분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을 텐데, 나는 그때 무어라 답변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4.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자 마침내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3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나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름의 뜻이지 이름은 아닙니다. 사실 그 이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쓰여 있느니 읽어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본래 모음은 없고 자음으로만 구성된 문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소개된 부분도 자음으로만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가를 영어로 표현하면 YHWH 네 글자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거룩한) 네 개의 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보통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훈련받은 서기관이나 랍비들만 이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히브리어에 모음이 붙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마소라 학자들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나 거룩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일상 속에서 아무 때나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너무나 거룩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평소에 이 단어를 읽을 때는 본래의 발음을 피하고 아도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합니다. 아도나이는 주님이란 뜻입니다. 성경을 필사하다가도 이 단어를 써야할 때는 펜을 물에 씻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대속죄일 (Yom Kippur, 성서력 710, 양력은 9-10월 사이)입니다. 대속죄일이면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에 네 번 홀로 들어갑니다. 조금의 빛조차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데, 바로 이때에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아도나이가 아닌 하나님의 본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병사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순간만은 하나님의 본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감히 그 발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할 만큼 거룩한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취급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놀랍게도 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이 잊혀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저 유사하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다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적의 역사, 역사의 기적을 이룬 것보다 더 놀라운 일, 아닙니까? 왜냐하면 기적의 역사는 바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의 의미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상징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고 그리하여 누구도 그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는 말의 의미는 첫째, 하나님은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공동체, 그리고 그 어떤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지식의 소유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내 지식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아 자기 곁에 세우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다, 그리하여 알 수 없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질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파울 틸리히는 말했습니다. “신학적 질문에 사로잡힌 자가 신학자다. 신학적 질문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가 교회에 속한자라 하여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여도, 자신이 성령에게 사로잡혀 있음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는 신학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신앙의 질문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즉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이 없다면 그가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은사를 확신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 질문이 있을 때에만 신앙은 살아있는 것이 됩니다. 질문이 있을 때에만 대답도 얻을 수 있습니다. 청년부를 맡아 설교하고 가르치던 시절, 한 청년이 신앙의 문제로 제게 질문을 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청년이 말했습니다. 많은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같은 내용으로 여러 번 설교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러나 그 청년은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질문이 있고 없고에 따라 같은 이야기, 같은 대답이 들릴 수도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사소한 호기심이라도 덮어두지 마시고 발전시켜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저에게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단순히,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말만 주고받는다면 목사와 신자의 관계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긴 어렵습니다.

 

5. 이 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앞서 읽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 가운데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믿음은 이스라엘 민족이 견디기 어려운 모진 시련을 극복하고 자기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팔레스틴의 소식들,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무고한 민간인과 어린이조차 무자비하게 살상되었다는 소식들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이스라엘의 자의식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의 본문 신명기 7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가 소개됩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그들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미약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기준을, 그 이유를 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기준은 그들이 강할 때가 아닌 약할 때, 그리고 그들이 다른 민족을 억압할 때가 아닌 억압을 받을 때임을 잊은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면서 자기의 강함을 내세워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되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임을 이스라엘은 잊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역시 앞에서 말한 적어도 세 가지 기준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을 내 곁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늘 하나님 앞에 세워서 자신을 성찰함으로서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이고자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이 그렇듯이) 호기심은 사랑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만 깊어질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이고자 한다면, 자기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름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힘과 강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할 것은 자기의 약함이 아니라 자기의 강함이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는 교만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를 기억해 내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이 팔레스틴의 상황을 평화로써 해결해 가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약할 때 오히려 약한 자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그 분의 소유된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약한 자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분임을 우리가 기억하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은 인간의 소유가 아닌 인간을 소유로 삼으시는 분임을 또한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하나님 당신에 대한 질문들이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성문밖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들을 서로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키워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통한 아름다운 교제가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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