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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나는 대치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설교본문: 역대하 211-7, 마태복음 1812-14

설교 후 찬송: 526 목마른 자들아

 

오늘의 설교 제목은 나는 대치 불가능한 존재입니다입니다. 대치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일하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대치 불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나는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유일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진실로 구원의 현대적 의미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해가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대치 불가능성이란 말은 자주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서 미리 설명 드렸습니다.

 

1 다윗의 인구조사

오늘의 본문은 숫자를 세는 이야기입니다. 즉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세는, 다윗의 인구조사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숫자를 세는 일하면, 제게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서 일할 때, 저는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의 숫자 세는 일을 맡았습니다. 제가 숫자를 세는 순간은 대표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저만 홀로 외로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하는 교인들의 머리수를 헤아렸습니다.

 

제가 교인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은 겉보기엔 단순한 산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일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먼저 숫자를 세던 두 사람의 교역자가 교체되고 제가 세 번째로 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역자는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차 범위를 넓게 잡아 대충대충 숫자를 세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이 보기에 그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적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교역자는 교인 수를 헤아리는 일에서 탈락하였습니다.

 

두 번째 교역자는 꼼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교역자가 왜 탈락하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철저하게 숫자를 셌습니다. 예배당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유아실, 방송실, 그리고 예배 중간에 화장실에 간 사람까지도 빼놓지 않고 셌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교역자보다 대략 열 명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일부의 교인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두 번째 교역자가 담임 목사의 의도대로 숫자를 불리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교역자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병이 깊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담하지도 꼼꼼하지도 않은 성격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미 두 명의 교역자가 교체된 이후였기 때문에, 담임 목사도 교인들도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암묵적 동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저는 꽤나 오래 별 잡음 없이 교인 수를 셀 수가 있었습니다. 그저 시기가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교인 수를 세면서 누구에게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지나면서 저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정치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시청에서 종종 있는 집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회가 있을 때마다 경찰의 집계와 주최 측의 집계는 많게는 10, 적어도 5배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교인 수 역시 단순한 숫자가 아닌 목회자의 목회성적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로 여겨졌기 때문에 제가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자신의 최측근인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이라면 그 어떤 위험한 전장도 불사하던 심복 중에 심복이었으나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 불어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높으신 임금님, 백성 모두가 다 임금님의 종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런 일을 명하십니까?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 받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요압은 간곡히 호소합니다. 인구조사는 하나님께 벌 받을 짓이라고, 다윗이 인구조사를 강행한다면 인구조사를 명령한 다윗만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벌 받을 짓이라고 말하며 인구조사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명령이 완고하고 지엄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결국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합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다 다니며 인구를 조사했는데 그 수가 이스라엘이 백 십만, 유다가 사십 칠 만이었습니다.

 

왕이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 7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일을 악하게 보시고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신 내용은 우리가 읽지 않았습니다만 간략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마친 후 하나님은 선견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 세 가지 재앙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삼년의 기근, 둘째는 다윗 자신이 석 달 동안 적들에게 쫓기는 것, 셋째, 사흘간의 전염병이 이스라엘을 휩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하셨겠습니까? 교사예배에서 여쭤보니 우리의 선생님들은 모두 두 번째를 선택하시더군요. 자기의 잘못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태도겠지요? 그러나 다윗은 세 번째 재앙을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흘간 전염병이 이스라엘에 창궐하여 무려 칠 만의 백성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궁금할 질문은 아마도 인구를 조사한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숫자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숫자는 때로 힘입니다. 그 힘은 때로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마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윗의 명령을 따라 인구조사를 마친 요압이 내놓은 결론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백성의 수를 보고 하였다. 칼을 빼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온 이스라엘에는 백십만, 유다에는 사십칠만이 있었다.”

 

이 숫자에 속하는 사람은 이십 세 이상의 청, 장년들입니다. 유사시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결코 전쟁을 위해서만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친구요, 누군가의 애인이고, 또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백십만, 사십칠만 이란 숫자 속 그 어디에도 그들의 이 같은 사연은 없습니다. 숫자는 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연을 지워버렸습니다. 숫자는 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격을 몰수하고 오직 칼을 잡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기능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기억하지 않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도자 밑에서 그 나라의 백성이 과연 어떤 재앙인들 피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오로지 비인격적인 숫자로 대치시켜 버리는 지도자에게 그 어떤 백성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도움을 요청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지도자에게 도대체 백성의 목소리가 들리기나 하겠습니까?

 

백성의 사연과 개별성을 지워버리고 백성의 기능만을 취하려 할 때, 이미 재앙은 시작되었고 백성을 비인격적인 숫자로 대치시켜 버렸을 때, 재앙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사연과 개별성을 몰수하여 비인격적인 숫자로 대치시켜 버리는 것, 이것은 악마의 농간에 놀아나는 짓이라고 본문은 이미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현주 목사님의 글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숫자는 악마다. 그것은 처음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악마는 지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수가 없다면 가야바의 지론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 즉 예수 한 사람을 희생시켜 온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 개인이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전제는 그 모든 설득력을 상실할 것이다. 하나, , , 넷 수를 세면서 현대인은 무덤으로 행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원인에 대해 제대로 밝혀진 것 하나 없는데도 도대체 몇 날 며칠을 이러고 있을 거냐고 날짜만 세고 있는 이 나라 일부 어른들, 경제가 침체될까 걱정이라며 소비 지수만 세고 있는 이 나라 대통령,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수와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를 비교하며 숫자놀이에 여념이 없는 이 나라 국회의원, 이들과 함께 우리도 하나, , , 넷 수를 세면서 더 큰 재앙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습니다.

 

개인의 사연과 개별성을 빼앗아 비인격적인 숫자로 대치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 시대에서 구원이란 빼앗긴 사연과 개별성을 되찾는 것, 내가 결코 비인격적인 숫자로 대치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두 번째 본문, 마태복음 1812-14은 분명한 깨달음을 준다고 믿습니다.

 

다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어떤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 목자는 양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산에 버려진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어찌되는 거냐고, 한 마리 찾으려다 아흔 아홉 마리마저 잃는 것 아니냐고, 그런 무책임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런 비합리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숫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그런 항변이 정당성을 얻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숫자놀음이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구십구 대 일이란 숫자놀음으로 보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는 목자에게 단순히 숫자 하나로 대치될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대치될 수 있는 양이라면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그 양을 찾으러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그 양은 그 양만의 사연이 있는 양입니다. 다른 어떤 양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개별성을 가진 양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목자는 양을 숫자로 보는 목자가 아니라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사연을 듣는 목자이고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별성을 보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제는 잃은 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잃은 양 한 마리를 숫자 하나로 보지 않고 그 양의 사연을 알고 그 양을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유일한 양으로 보는 목자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자의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성문밖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나에게서 사연을 빼앗고 개별성을 몰수하여 비인격적인 숫자로 대치하면서 이런저런 숫자놀음의 대상으로 만들지만 하나님은 나의 사연을 들으시고 나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 대치 불가능한 존재로 보신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문밖 교우 여러분,

저 역시 성문밖 공동체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문밖 공동체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숫자로 대치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으로 제 마음에 자리 잡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임은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성문밖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성문밖 공동체 교우들이 세상의 숫자놀음에 현혹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숫자놀음 속에서 재앙을 자초하는 이 사회의 죄악을 판단하시는 성문밖 교우가 되시길 빕니다. 그리고 세상은 타인의 사연을 빼앗고 개별성을 몰수하여 그 사람을 대치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풍조가 대세를 이룬다고 하여도 우리 성문밖 교우들은 타인의 사연을 들어주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타인을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 성문밖 공동체에 속한 교우들끼리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저는 기쁘기 그지없을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세상은 우리를 숫자로 본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연을 들으시고 우리를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보심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세상에서 자기의 사연을 들어주지 않아 억울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 사람을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축도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존재들인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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