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자료
2014.08.03 20:47

2014.08.03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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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돌아오라

설교본문: 이사야 55, 7

설교 후 찬송: 52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본문을 보면 돌아오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나님은 누구를 이처럼 애타게 부르실까요? 착한 사람 부르시나요?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 부르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이 아닌 악인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 불의한 사람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일까요? 하나님은 악한사람, 불의한 사람 불러다가 어디에 쓰시려는 것일까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도 이해하기 어렵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과연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나요?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만약 착한 사람 부르신다면, 정의로운 사람 부르신다면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일까요?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니까, 저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겠지, 그러니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잠시 소설가 공지영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가 소설가 공지영씨의 책, 수도원 기행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공지영씨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지영씨는 중학교 시절, 성당에 나가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공지영씨는 대학에 진학하여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어느 날 데모를 하다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는데, 성당에서는 마침 명동성당 건축 기금마련을 위한 미사가 한창이었다고 합니다. 공지영씨는 그날부터 교회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불의한 사회에 아랑곳하지 않는, 들끓는 세상과 상관없이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교회의 모습에 실망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후로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공지영씨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지영씨는 18년 동안 발길을 끊었던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공지영씨는 자기가 교회로 돌아오게 된 그 즈음, 그녀의 내면 상태에 관하여 대략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십대의 나는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삼십 대가 되자 이십대에 알던 모든 것이 모르는 것으로 변해있었다. 처음부터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르는 것으로 변해 버린 상황은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인생에서 뭘 바라는 거니? 누군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귀에서 웅웅 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엎어져 있을 수는 없다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내가 왜 태어나 이렇게 밖에는 살 수 없는지 그걸 밝히고 싶다고 그렇게 떠돌다가 나는 엎어져 버린 것이다. 내가졌습니다. 항복합니다. 항복...합니다. 주님.”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입바른 소리도 제법 하면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혀 버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네가 진정 바라는 것, 너의 삶, 네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기는 하는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는 아마도 공지영씨 자기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로 돌아온 공지영씨를 보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합니다. “지영씨, 하나님이 쓰시려고 부르셨나봐.” 공지영씨가 한국의 유명한, 영향력 있는 작가이니 하나님께서 그러한 그녀의 재능을 쓰시려고 부르신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공지영씨도 그런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기도를 드리다가 질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인데, 그런 분이 뭐 아쉬울 게 있어서 나를 부르시겠는가? 나의 재주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이르러 갑자기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작은 재주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내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공지영씨는 막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 부분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것은 공지영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나의 이야기, 또한 우리, 모든 인간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부르시는 것, 불의한 자를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어떤 쓸모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저 사랑 때문에 부르는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래입니다. 사랑의 노래, 노래 중의 노래라고 불리는 아가 8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온 재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놓고 거래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적 가치나 쓸모,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 일서 4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무슨 말씀일까요? 타인을 평가하되 그의 쓸모를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자기의 쓸모를 통해서 증명하려는 사람도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외의 다른 이유로 사랑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자기의 쓸모 있음을 증명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는 사람은 그저 사랑하기 때문에 부르시는 하나님을 간과하게 됩니다. 그는 그저 자기의 행위와 능력에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자기의 존재가 아닌 행위와 능력을 통해 증명하려는 사람은 대단히 취약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우월감이나 상대적인 열등감 사이를 오가며 이리저리 흔들릴 뿐입니다. 남들이 잘한다고 하면 그런 줄 압니다. 남들이 못한다고 하면 자기가 타인의 평가대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타인의 평가에 맡겨 버리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는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쓸모만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줄 세운다. 조금 쓸모 있는 사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쓸모로써 자기를 증명하고자 애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증명하기 이전,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내가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이전,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가 아무런 이유 없이(은혜로써)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서 보편적 인권을 지지하는 인간선언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쓸모를 증명하기 이전에,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린이, 장애인, 노인은 그 어떤 인간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것!)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는 사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쓸모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에게도 타인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양의 옛 선비들은 위인지학이 아닌 위기지학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위인지학은 타인을 위한 공부란 뜻입니다. 그리고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란 뜻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엔 위인지학이 세상을 위해 더 유익한 공부처럼 보이고 위기지학은 이기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대부분의 연구결과는 공부 그 자체에 대한 재미에 푹 빠져 공부한 사람들,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재미있어서, 자기를 위해 공부한 사람들의 연구결과입니다.

 

쓸모로써 자기와 남을 평가하는 것은 자기와 남을 하나의 기능으로 보는 겁니다. 어떤 기계의 나사와 같은 한 부속품으로 자기를 보는 겁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기능은 대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면 그냥 바꾸어 버리면 되는데, 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의 기능으로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난 주일에 설교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기능, 아닙니다. 대체 가능한 존재,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입니다. 독일어로 Individuum입니다. 개인이란 사전에 따르면 이런 뜻입니다. (bildungsspra.) Mensch als Einzelwesen [in seiner jeweiligen Besonderheit]

 

각자의 특별함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서 인간”, 개인이란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사라지면 단순히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그 특별함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어떤 기능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만이 가지고 있던, 나를 나이도록 해주었던 그 특별함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까닭은 우리가 그런 대체 불가능한 존재, 단순히 갈아 끼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간난 아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간난 아기가 가진 능력은 무능력뿐이고 간난 아기의 소유는 무소유뿐입니다. 누군가 아기의 입에 무엇인가 넣어주지 않으면 아기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아기는 타인을 돕기는커녕 무한정 타인의 도움을 그저 받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능이란 측면, 쓸모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기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무엇을 가졌느냐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그때 받아들여진 것은 아기의 기능이나 능력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아기의 존재 그 자체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아기의 얼굴을 보면 한 군데 그늘도 없는, 죽은 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기능이나 능력이 아닌 자기의 존재가 개인으로서 받아들여졌을 때 온전히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은 그 온전한 생명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세상은 우리를 더 이상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나를 그리고 내가 타인을 기능으로, 쓸모로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는,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늘 쫓기는 것만 같습니다. 남들의 평가에 따라 나는 살아나기도 하고 시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기조차 자기 자신을 기능으로, 쓸모로 보게 되면서 우리의 온전한 생명은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나는 길은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뿐입니다. 너는 바꾸어 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너는 하나 뿐인 사람이라고, 너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너는 그 자체로서 이미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엇을 이루셨나요? 돈을 많이 버셨나요? 권력을 잡으셨나요? 자기를 위해 목숨 거는 제자들을 키워내셨나요? 아니 장가라도 가 보셨나요? 기능이란 측면, 행위와 업적이란 측면에서 보면 거의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인간의 본래 가치가 그런 것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 그 어떤 모욕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존귀함이 인간에게 본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가치, 우리의 고귀함과 존귀함을 본질적인 의미에서 다시 발견하도록 해 주신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과는 달리 인간을 하나 밖에 없는, 다시는 존재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진 개인으로서 받아들여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을 기능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 가치 있게 받아 주는 곳이 될 때, 교회는 존재할 가치를 지니게 되지 않을까요?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야, 교회는 이 세상에서 더 확대될 가치를 가지는 것 아닐까요?

 

성문밖 교우 여러분,

믿음은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공로 없이, 하나님께 그냥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의 가치를 나의 행위와 업적, 쓸모로서 증명하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행위와 업적이나 쓸모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의 본문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다 이루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문밖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동안에 결코 죽어지내지 않고 자기의 생명을 꽃피워 내고,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타인들을 향해서도 그들이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못할 특별하고도 유일한 사람들임을 일깨워 주시는 성문밖 교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쓸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랑 때문임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가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교만이나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우리가 우리의 쓸모가 아닌 오직 사랑으로만 부르심을 받았으니 우리 성문밖 공동체가 서로를 사랑으로만 부르고 우리 성문밖 공동체에서는 누구라도 그의 쓸모로써 평가받지 않는 곳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메시지를 남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통한 아름다운 교제가 세상에 다시없을 유일하고도 특별한 존재들이었으나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린 세월호의 아이들, 또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으로 호소하는 부모들, 그들과 연대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사랑하는 성문밖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환갑축하 기도

생명 되신 하나님, 당신의 섭리와 예정 속에서 세상에 다시없을 유일하고도 특별한 존재로서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사랑하는 딸, 박점순 권사는 오늘 60번째 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당신의 딸은 인생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 이전에 하나님 당신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였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 기억을 통하여 인생 속에서 받았던 모든 상처로부터 치유 받게 하시고 또한 치유 받은 자로서 타인을 치유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딸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던져 헌신하며 꿈꾸던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 꿈의 성취가 아직은 멀리 보이는 것 같으나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그처럼 아름답고 정의로운 꿈을 품고 살 수 있었던 은혜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님, 당신의 딸에게 허락해 주신 세상에 다시없을 남편과 자녀들과의 모든 관계가 오늘을 기점으로 서로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해주십시오. 또한 당신의 딸이 만나 오랜 시간 친 동기간처럼 우정을 나누는 모든 친구와 동지들과의 우정도 날로 더 깊어가게 하옵소서. 성문밖 공동체에게 오늘과 같은 경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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