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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발 아래 엎드려
요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이 땅에 아기예수께서 오시어 평화와 정의를 이루시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또한 성문밖공동체가 공동체를 위한 안수집사를 더 피택하여 안수하는 날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큰 잔칫날을 앞에 두고 성문밖공동체의 즐거운 잔칫날을 함께 하게 되어 더 없이 좋은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를 위한 잔칫날과 잔칫상을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릴적 시골동네에서 잔칫날하면 생각나는 건 동네어르신들의 환갑이나 칠순입니다. 교통편이 그리 좋지 않았던 저희 동네에서는 결혼식을 빼고는 동네에서 잔치를 치루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선물을 가져오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날 만큼은 주인공을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함께 했습니다. 잔칫날하면 생각나는 건 잔칫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사상이나 시제라고도 하는 묘사상이 차려지는 날도 잔칫날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먹을 음식이 그리 녹녹치 않았던 어린 시절 다양하고 풍성하게 차려진 잔칫상과 제사상을 보고 있으면 마음과 삶에 더 바랄 것이 없는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읽다보면 그는 언제나 잔치를 몰고 다닌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산이 많거나 좋은 집이 있다거나 권력이 있어 스스로 베푼 잔치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잔치에 예수를 초대하거나 예수를 위해 잔칫상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 잔치는 베다니에서 있었습니다. 베다니라는 동네는 사람의 이성을 초월한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그곳에서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라는 사람을 살려내었던 것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고,그의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 또한 예수님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습니다.나사로와 마리아,마르다,그리고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동네에 다시 방문하자 그를 위해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로 시작했는데 막상 잔치가 베풀어지자 나사로와 마르다,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친밀한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마르다 또한 예수님과 마을 사람들에게 잔칫상 차려주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께서 자신을 살리실 때의 그 흥분되는 체험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변화시킨 종교적 체험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간증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나사로는 자신의 신비한 체험들을 숨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습니다.베다니 사람들 또한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난 체험과 그 순간의 느낌들,황홀감을 듣고 싶어 했고 열망했습니다.나사로의 경험은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한 인간으로 살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지금 나사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했습니다.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했습니다.나사로에게는 이 놀라운 경험을 가슴 속에 담아두고만 살기에는 받은 종교적 기쁨이 너무 컸습니다.그래서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에서 진작 축하받아야 되고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될 예수님은 뒤전이 되어버렸습니다.

 마르다의 열정은 여전했습니다.마르다는 예전에도 예수님을 영접할 때도 시중을 드느라 열중하면서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에게 자신을 좀 도우라고 다그쳤던 일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에게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면 족하다면 자중 시켰었습니다.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했습니다.그런데 이번엔 그녀의 열정에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예수를 위해 베풀어진 잔치에 예수가 소외된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체험에 황홀해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사로,열정을 다해 시중들고 있는 마르다,그리고 나사로의 말에 열중하며 듣고 있는 사람들과 마르다의 시중을 받으며 만족해 하고 있는 사람들,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즉 유대 권력자들의 거칠고 포악한 음모가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유대 대제사장들과 그의 하수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나사로도 함께 죽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나사로,자신을 믿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종교적 신비와 삶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이는 나사로와 마르다에게도 있는 체험과 열정입니다.그러나 나사로와 마르다에게서 보지 못한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나사로와 마르다에게는 없고 마리아에게는 있었던 건 죽음의 현실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헌신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과 열정에 머물렀습니다.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현실을 가장 민감하게 느꼈고,그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식에 쓸 향유를 깨트려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는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와 열정으로 살아가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생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집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일년 동안 삯으로 받은 향유를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아련하지만 종교적인 체험과 삶의 열정 너머에 있는 인간 삶의 성스러운 본질의 어느 부분을 더듬어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가룟 유다에게 이해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될 일 처럼 보였습니다.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며 투덜거렸습니다.요한은 가룟 유다가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라고 고발합니다.

 삼백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일 년 치에 달하는 임금의 가치가 있었습니다.한 사람의 노력과 얻어진 소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를 생각하면 유다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그 때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물질과 정성을 쏟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사랑과 나눔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유다의 모습 속에서 순수하지 못한 인간의 욕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유다의 말은 가난한 자들의 복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물질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교회들이 한국사회에서 복지부분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여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욕심과 폭력 또한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유대격언엔 “격렬하게 사랑을 하고 있을 때는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하고 것인지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지 잘 생각하라”고 했습니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과 나눔을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혹시 우리의 선행이 소위 말하는 천국 창고에 쌓여 있어 백배로 되돌림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선행은 행하고 있는 자신과 선행 그 자체가 이미 보상입니다. 더 이상의 자랑하고 싶고 몇 배로 더 보상 받고 싶은 마음은 우리 내면에 은밀한 탐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은밀하게 숨은 이기적인 투덜거림을 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잔칫날 잔칫상 앞에서 종교적인 체험과 삶의 열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모든 번뇌와 고통을 미리 준비하고 보듬은 마리아의 행동을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칭찬하며 기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그 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은 일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과 다른 차이는 무엇일지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성서 해석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헌신이다. 예수님에 대한 희생이다. 그러니 예수님께 헌신충성봉사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일들은 나사로의 종교적인 체험과 마르다의 열정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위해 베풀어진 잔칫날에서 십자가라는 고난과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치,종교,사회,문화,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패와 부정, 탐욕의 온갖 죄악들이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이는 정의가 죄에 이끌려 나무에 메달려 구경거리가 되고, 가난한 민중들의 참 평화가 처절하게 찢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서워 도망가고 무지하여 동조한 아픈 역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자신이 가진 최고의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긴 것은 정의에 입 맞추며 자신의 온 몸을 헌신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결집하여 예수님을 죽이려하고 사람들은 이적과 표적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할 때 마리아 만큼은 정의 아래 엎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서 사랑과 정의에 입을 맞추고 세상에 평화를 초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섬김은 땅 끝까지 이야기되어져야 하는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잔칫날 잔칫상과 같은 축복입니다. 풍성한 식탁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플 때 서로를 위로하고 문안하며, 힘겨운 일이 있으면 마음을 모아 기도해 줍니다. 아침에 뜨는 태양과 저녁에 지는 노을을 보며 시를 읊고 술 한잔의 여유도 갖고 사랑으로 열정을 불태우기도 합니다. 

 나사로의 신비하고 복된 체험들과 마르다의 삶에 대한 열정이 있는 우리의 인생에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정의와 평화를 주신 예수께 부어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온 몸으로 닦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향기가 온 방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이 나라와 뭇 생명들에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이십시오. 그 잔치 안에 하나님의 신비하고 거룩한 체험들과 모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의 열정은 가장 기본적인 잔칫상의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앉은 인생의 수 많은 잔칫날 메인 메뉴는 오늘도 예수님과 나사로를 죽이려는 음모의 세력들을 이겨낼 정의로 입맞춤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 성문밖공동체는 이를 위해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 가난을 가져온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것은 정의를 숨기고 부정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성문밖공동체는 정의를 향해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안수 받으시는 집사님들이나 모든 교우들이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아래 자신의 가장 존귀한 것을 부어드리며 머리털로 씻겨 드리는 삶을 살아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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