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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발, 눈으로 공감하는 예수님”
마 18 : 6-9
6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7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는 화가 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8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9 또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배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ex) 자녀에게 고통을 가르치라
퇴근시간, 인천 쪽으로 가는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을 지나면서 사람이 더 밀려 죄이기 시작했습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부인이 없었고, 다른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는데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정도로 보였습니다. 서 있는 아이가 힘들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참아, 아빠는 매일 이렇게 타고 다니셔.” 그러면서 남편을 바라보는 그 여인의 얼굴, 그 미소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랑, 삶에 대한 건강함이 가득했습니다. - [아름다운 내일을 여는 213가지 이야기] 중

서울의 바쁜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큰 고통이나 슬픔, 기쁨은 보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작은 일상 속에서 타인의 마음과 몸을 이해하는 일은 자신의 마음과 몸을 성찰해야 하는 수고가 뒤따라야 가능해 지곤 합니다.

교통사고를 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운전 중 사고 현장을 지나칠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운전자와 탑승자의 안녕을 빌 것입니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내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부서진 차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박진감 넘치는 일로 보일지 모릅니다.

1월 1일, 조지송목사님께 새해 인사를 가는 도중 노량진수산시장 앞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습니다. 뒤 따라오던 외제 승용차 운전자가 실수로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제가 운전하는 차 뒷부분에 부딪힌 것입니다. 1~2주가 지난 후 어머니께 이런 저런 말씀을 하다 계속 치료받고 있고 합의를 아직 해 주지 않았다고 하니 어머니께서는 ‘너도 운전하고 다니는디 얼릉 해 줘라이~’하고 달래시는 것입니다. 처음엔 아들 걱정이 먼저지 다른 사람 돈 들어갈 거 먼저 생각하시나하고 살짝 서운할 뻔 했지만 어머니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을 느꼈습니다. 시골에서 일만 하시고 남이 싫어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삶은 도심 속에서 내 몸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추구하고 사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는 한 주간,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을 사는 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종교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황금률을 반석 삼아 살아가는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웃의 이익을 네 이익처럼 받아들이고 이웃의 손실을 네 손실로 받아들리라. - 도교 <태상감응편>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 유대교 <탈무드, 샤바트 3id>
친절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보다 위대하다. 그리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모든 제사보다 중요하다. - 유대교 <탈무드>
너도 한 마음으로 형제가 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너는 믿는 자가 아니다. - 이슬람 <수나>
정의로운 행위는 반드시 그 사람의 영혼을 유익하게 해준다. 악행은 그 사람의 영혼에 해를 입힌다 - 이슬람 <코란>
네가 싫은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 유교 <논어 12:2>
다른 사람이 발전하도록 보살피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발전을 확보했다. - 유교 <공자>
네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도 다치게 하지 말라 - 불교 <우다나바르가 (법구경)>
불도, 바람도, 탄생도, 죽음도 우리의 선행을 지울 수 없다 - 불교 <붓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기독교 <마태복음 7:12>
만물을 자신 안에서 보고 자신을 만물 안에서 보는 자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남을 해치지 않는다. - 힌두교 <바가바드기타>
http://blog.naver.com/streamtuner/150131662183

모든 종교는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지 않고 서로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타인도 싫어할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타인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과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한 생각과 마음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가장 작고 낮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6절)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라는 말씀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존중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과 감각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시기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70~1988 경기경찰청 공안분실 실장을 역임했고, 2008~2012.01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공안분실 실장으로 있을 당시 많은 민주 운동가들을 고문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고문당한 고 김근태 의원이나 많은 사람들은 고통과 공포의 후유증으로 고통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기보다 어느 날 목사가 되어 자신이 가한 고문은 역사의 상황에서 정당했고 또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그대로 할 것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불을 맞아 타인의 몸에 대한 감각이 제로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면 고문하던 그 사람의 손과 발과 입과 몸은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습니다.

“누구라도”(6절) 어떤 사람의 몸에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 일입니다. 권력과 자본을 뒤에 업고 다른 사람의 몸에 죄를 짓는 것은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예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 그런 손과 발은 찍어서 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도 제 인생에 그런 폭력을 쓴 적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살펴보니 많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동생이 말을 안 듣는다고 무자비하게 때렸고, 친구들과 싸움 하며 돌로 찍기도 했고, 선배들에게 맞은 대로 후배들에게 되물림하기도 했습니다. 군 생활 하면서 후임병이 다른 후임병들을 때려 죽일 것 같다는 이유로 제가 먼저 나서서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후임들에게 목침을 놓기도 했고, 근무를 너무 태만이 한다는 핑개로 또 한 번 목침을 놓은 적도 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함께 사역하는 목사 중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이유를 달아 몸으로 싸운적도 있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요즘은 그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제 마음이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갖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은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멸시하며 누군가를 낮게 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생보다 힘이 강했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돌로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찾아와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들판에 매장하고서 뻔뻔하게 내가 동생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겠냐며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하나님께 되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창 4: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수 없는 전쟁과 폭력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모든 전쟁과 폭력을 왜 했는지 따져 물으면 이유 없는 전쟁과 폭력은 없습니다. 모두 자신은 그럴만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학교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이 하나같이 그 아이는 맞을 만 했고 왕따 당 할 만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 누구도 맞을 만 하며 업신여김 받을 만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을 성찰해 보면 명예와 권력, 부와 지식수준, 외모와 스펙을 보고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업신여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 때론 공공기관이 권력을 이용해 한 생명에게 무참한 폭력을 가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모두 자신들의 명분을 내세우고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 정의를 외면하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죄를 짓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죄를 짓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의 손과 발이 누군가의 마음과 몸에 죄를 짓는다면 찍어 내버리고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좋다고 하시고, 또한 눈이 죄를 짓게 하면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 손과 발, 네 눈이 아픈 것처럼 다른 사람의 손과 발, 눈의 아픔에 공감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가는 문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느끼는 즐거움과 고마움, 아픔과 고통, 번민과 스트레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아이들과 조카들 넷을 데리고 예술의 전당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매그넘사진전’이 있었는데 8명의 사진작가들이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에이즈 환자들이 치료받기 전과 후를 사진으로 담아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며 에이즈 치료를 위해 함께 마음을 모으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시회였습니다. 사진전과 동영상을 함께 관람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오늘 본 것들 중 기억에 남는 사진이나 느낌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다섯 살짜리는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아저씨가, 아홉 살짜리 딸은 에이즈 환자 남편의 볼에 키스하고 있는 부인의 모습이, 아홉 살 남자 조카는 병으로 인해 바짝 마른 등을 보여준 사진이, 제일 큰 아이는 변태 같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마다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큰 아인데 좀 더 다른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변태 같다는 말에 순간 ‘이건 뭐지? 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하고 멈칫했습니다. 1시간을 넘게 지하철을 타고 비싼 비빔밥을 사 먹이며 보여준 수많은 사진들을 보고 변태라니 그 말에 담긴 의미와 느낌이 무엇인지 되물어 보았습니다. 큰 아이는 사진 속의 사람들의 모습이 자신이 보고 경험하는 일상과 색다른 느낌과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큰 아이는 에이즈로 변해버린 사람들의 아픈 몸을 보고 그들에 대한 연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분명 다른 몸과 마음,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몸이 느끼는 감성들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면 그 사랑 눈길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보내는 친절하고 따뜻한 눈빛을 어느 누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몸(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지구의 돌과 광물, 물과 공기, 우주의 생명체들의 몸과 그들의 소리에 대해 인간의 몸을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폭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우리의 몸이 가족과 친구, 아픔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몸, 지구생명체들의 몸 하나하나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성찰하고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과 정의로움에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 고통에 공감하며 예수님처럼 그들의 몸에 다가가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예수님의 “생명 감수성”이 손과 발, 눈, 온 몸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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