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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찾은 가나안 여인
마태복음 15: 21~28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씀 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스페인에는 800km가 넘는 순례자의 길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하루 20~25Km를 40일정도 걸으면 완주 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 순례자의 길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길의 유래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헤롯왕에 의해서 순교하자 야고보의 제자들이 그가 전도하였던 스페인에 유해를 묻기 위해 걸었던 길이라고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순례의 길은 100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지금도 자신의 내면과 부딪친 문제들, 삶의 문제들, 참다운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이 길을 걸으며 만든 "The W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걷다 조난을 당해 숨지자 아들의 유해를 짊어지고 순례 길을 걷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안과의사입니다. 아들에게 연락이 없는 것을 투덜거리며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있는데 아들이 순례길 첫날에 거친 날씨 속에 사고로 숨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달려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화장해서 작은 상자에 담아 아들이 못다 걸은 길을 걷기로 마음을 결정합니다.

아들은 애초부터 자신과 자신의 인생의 참 의미의 길을 찾는 순례의 길을 걷기 위해 나섰지만, 아버지는 단지 아들의 유해를 품고 아들의 못다 걸은 순례자의 길을 걷습니다. 가는 도중 아들의 유해를 순례의 길 곳곳에 뿌리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와 삶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과 만나기도 합니다. 아버지 톰이 처음 순례 길을 걷기로 결정하는 장면에 아들이 순례여행을 떠나기 전 공항에 데려다 주면서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의 유명한 대학을 그만둔 아들이 끝내 못마땅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참 모습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기어코 순례길을 떠나는데 인생은 선택이라며 남들이 다 가는 길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요구에 “인생은 선택이 아니라 누리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인공인 아버지 톰은 아들이 했던 말을 기억하며 순례길을 떠나게 됩니다.
늘 성공만을 선택해서 살아온 아버지 톰은 순례자의 길 위에서 인생은 성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자신을 누리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누린다는 것을 찾게 됩니다.
아버지 톰은 나이가 많은 안과 의사로 설정되었는데 영화는 자신과 인생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고 살 것을 종용하는 듯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자신을 찾고 마귀 들린 딸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한 가나안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어떠한 부분을 예수께서 인정하셨는지 더 깊이 묵상해 보고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좀 더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이 본문은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방사람들에게 다가왔는데 마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의 모습과 같이 해석합니다. 주인의 상은 유대인들, 빵은 구원, 강아지는 이방인, 이러한 3단구조로 보는 것입니다. 보통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왠지 동의하기에는 유대이즘에 파묻혀 있는 해석에 불과합니다. 사실 마태복음은 유태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보낸 복음의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의 정서를 고려한다면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볼 때는 굉장히 거북스러운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이 유대그리스도인공동체를 위해 기록하면서 집필되고 편집되었다 하더라도 본문을 자세하게 묵상해 보면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여인을 만나기 전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시기 전 예루살렘에서 있을 때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유대교의 유래와 그 전통에 살아야 하는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이야기하며 그 중에 하나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손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 몸이 더러워 졌다고 질책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전통을 핑계 삼아 자신들이 정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예를 들면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족하다고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자신들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합리화시키며 좋을 대로 행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하신 후에 군중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공중에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곧 누군가를 해치는 생각이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문화의 규례와 관습, 규칙과 규범, 전통들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처럼 가르치고 따라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 정월대보름이 되면 동네어귀에 음식을 갖다 놓는 것, 일요일에는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 등등 종교마다 날을 정하고 그 날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규칙들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래왔으니 그래야 한다라는 식으로 종교전통은 법이 되어 사람 위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극심한 대립을 보이기도 하고 가정들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종교와 문화의 관습과 전통이 만들어 놓은 규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면 불경스러운 사람이나 예의 없는 사람, 잘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습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종교적인 편향적인 굴레와 딸의 귀신들림이라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을 좇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다윗 왕의 자손 예수가 자신의 동네에 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동네에 들어왔을 때 서슴없이 그 뒤를 좇으며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22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지극히 메시아사상이 인류의 대망이 된다는 신앙을 가진 신앙 내용입니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딸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외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외침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은 9:27~31에는 길가의 소경들도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쳤을 때는 함께 집으로 들어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의 많은 병자의 기적 사건은 유대인들이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외쳤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여인의 처지에서 왠지 더 서글퍼 보입니다.

종교적인 편향이 극심한 유대인들이 모여 앉은 식탁자리에 나와 괴로워하는 딸을 위해 무엇인가를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내어놓은 것은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고 ‘메시야’로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보통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높일 때 자주 쓰였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쓴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말한 것은 유대계그리스도인 신앙고백과 비유대계그리스도인 신앙을 동시에 고백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고백을 하는 여인에게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은 침묵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 뒤에서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딸을 위한 정성과 열정을 칭찬할 만합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여인의 마음이 애처롭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여인을 안심시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다를 때 같으면 예수께 얼씬도 못하게 했을지 모를 제자들의 모습이 조금 이상합니다. 철저하게 유대이즘에 빠져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비유대계 사람, 그것도 여자가 예수님과 자신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에 대해 순순히 받아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말씀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절) 철저한 유대이즘의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말씀을 지금 예수께서 하고 계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을 무서울 만큼 배타했고 여성들 또한 철저하게 멸시하고 차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러한 말은 제자들에게 당연하게 들릴 것입니다.

상상해 보았습니다. 유대의 전통을 중요시 하고 그 사상과 문화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따라 살겠다고 애걸복걸 하는 비 유대인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월감에 흠뻑 취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나안 여인을 위해 예수께 간청한 것은 우월감에 취한 알량한 선심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주인의 밥상 주변을 얼쩡거리는 강아지에게 음식 한 점 던져 주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술 더 떠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절)고 말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비유대인들을 배제시키는 발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가나안 여인이 예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젠 여기서는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말은 빠지고 예수님을 주님으로만 부릅니다. 여인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배타적인 유대인들의 신앙전통에서 한발 물러나고 이젠 자신의 종교와 문화, 자신의 뿌리에서 예수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심중에 있는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이쯤 되면 유대인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에 반기를 들고 화가 치밀어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니 잘났다. 어디 잘 먹고 잘 살아라’며 예수와 제자들 앞에 차려진 밥상을 걷어 차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 모든 멸시를 참아냅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에 대해 사람이 더럽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멸시와 모욕을 내고 독선적인 것을 뿜어내며 외식하였지만 이 여인의 마음은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 챌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7절) 여인의 이 말은 비굴하거나 누군가를 멸시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들 유대인들은 당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가지고 의롭다고 하지만 나는 당신들의 그런 외식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인의 상이 무엇이며 빵이 어떤 것인지, 개가 누구를 가르키는 지는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고 그것 또한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과 종교를 가진 인생들을 바라보는 편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참 모습에서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종교의 틀을 벗고 고로워하는 자신의 딸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에는 살인과 간음,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멸시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 앞에서 사랑하는 딸의 건강과 그의 영혼의 평화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는 그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28절)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바로 그 시각에 여인의 딸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마음에 어떠한 것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전통과 문화, 관습과 규율에 매여 살고 있는지, 그리고 마음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외부적인 많은 규범들이 될 수 있고, 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세심하지 못한 성찰로 인해 우리 자신을 더럽히고 올무를 놓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총선에서 과거 활동 중에서 여성에 대한 성숙치 못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많은 피해와 아픔을 받고 준 후보도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여성의 권리나 여성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자신의 과오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생각들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교육, 성과 인종에 있어서도 더 깊이 성찰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참된 자신을 찾아가야 합니다.

참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은 내 안에 선한 것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삶의 실천이 예수를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민과 섬김, 평화를 향한 연대와 실천, 자신만의 유익이 아니라 공공의 유익을 위해 아끼고 나누는 삶,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참된 나를 발견하여 고백하고 선포하며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 삶의 문제는 오늘 가나안 여인의 딸이 괴로움에서 해방 된 것처럼 구원에 이르고 해방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옭아매어 놓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게 하는 외식적인 것을 넘어 참된 자신을 찾아 하나님의 해방을 누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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