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153 추천 수 0 댓글 0
Atachment
첨부파일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38년의 희망
요한복음 5:1-9

1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1)히브리 말로 2)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아람어를 뜻함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베데스다' 3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9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베데스다(베드자다-헬라어)는 B.C 2세기 경에 만들어진 연못으로 넓이 60-80m, 깊이 7-8m로 남북으로 하나씩 두 개가 만들어 졌습니다. 오리게네스(Origenes.A.D 185-254)에 의하면 두 개의 연못이 있었고, 주위에는 4개의 행각(주랑), 중앙에 1개의 행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여러 시대의 건물들이 복합적으로 되어 있어 옛날 못의 형태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 베데스다는 가장 낮은 자리였고,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 하여 집과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베드자다 기둥들 사이에는 병든 이들과 소경들, 절름발이들, 손발이 말라비틀어진 이들이 무리를 지어서 누워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명절 그날 베드자다는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 되었습니다.

이 베드자다 연못 주변으로 모인 사람들을 ‘베드자다공동체 또는 베드자다사람들’ 이라고 불러봅니다. 베드자다 사람들이 이 연못에 모이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들의 병이 낫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연못에는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전설에 의하면 베드자다 연못이 출렁일 때가 있는데 그 때에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간 사람은 어떠한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잔잔한 연못이 출렁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찌되었든 출렁이는 일이 기적적으로 일어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한 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절대적이었고 베드자다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기대였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습니다. 언제 어떻게 연못의 물이 출렁이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오로지 연못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신성한 강, 신비로운 연못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고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세계 여러 곳의 사람들은 신성한 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인들은 갠지스강물로 목욕을 하고 그 강물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신성하게 여깁니다. 그 갠지스강가로 3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해 자신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넘기 위해 그리고 그 비참한 현실을 개선되고 변화되기를 언제나 바라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몸이 병들 때면 회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더 강렬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낫기를 바라고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노력들은 언제나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성경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의 현실의 고통, 실패, 좌절에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베드자다 공동체에는 그 누구보다 더 비참하고 더 처절한 현실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삼십팔년 동안이나 병으로 앓아 왔습니다. 이 사람은 어떠한 사람보다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병에서 회복되기를 바라며 노력하고 애썼을 겁니다. 의사를 찾아다니고 가진 재산을 다 써가며 치료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베드자다 연못에서 기적을 바라보고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1년, 2년, 3년, 5년, 10년, 15년, 20년, 30년... 한 해 한 해 그냥 지나갈수록 그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희망도 기대도 조금씩 사그라져 갔습니다. 마냥 누워서 지낸지만 몇 년째인지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는 이제 벼랑 끝에 매달린 희망, 기적의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 물을 출렁이게 할 때 누군가 가장 먼저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물 속에 던져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과 긴 세월을 이길 희망의 끊이 완전하게 끊어져 버린 채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명절이 찾아왔습니다. 베드자다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은 한 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누가 되었든지 연못이 출렁이는 순간 나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그 누군가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아 온 이 사람은 그날도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누워있었습니다. 오랜 병에 효자없다고 하듯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떠나고 홀로 누워 기적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이제 누군가의 도움만을 바랄 뿐 자신의 의지로는 베드자다 연못의 물이 출렁일 때 조차 어떻게 할 방법을 몰랐습니다.

베데스다(His will) - ccm 송 중

나는 꿈도 없이 소망없이 누워만 있네
작은 희망조차 내게는 사치라 여기며
누구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내 삶은
남아있는 호흡조차 의미가 없다네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그 순간 그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랜 병으로 사람들이 말도 잘 걸지 않는 그 순간 예수께서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낫고 싶으냐?”(새번역) “당신은 건강해 지시기를 원하십니까?”(공동새번역)

예수께서 찾아와 건강해 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는 말에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 말합니다. 자신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고 싶어 물이 출렁일 때 연못을 향해 가보지만 다른 사람들의 몸이 더 빨리 움직이고 먼저 들어가 버리기에 자신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한 두 번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는 해 볼 것 다 해보았지만 이젠 아무런 희망 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면 될 텐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좌절하고 있습니다’라는 겁니다.

이 어떤 사람은 오랜 투병 끝에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의지와 희망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낫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치유의 능력을 알았다면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38년 동안 처음 시작된 희망에 실패와 좌절이 쌓이면서 자신이 가장 강하게 가져야할 것을 많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8년 동안 병과 싸우며 지쳐버린 그리고 자신의 희미해진 희망을 붙들고 있는 이 사람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8)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의 도움을 구해야만 일어설 수 있고 베드자다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 어떤 사람에게 스스로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치유에 대한 희망과 회복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38년 동안 누워지내던 그 자리를 정리하라고 하십니다. 일어나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환자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의 확고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 절망과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시며 다시 희망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다시 한 번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양문의 문이라는 곁에서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고 있던 병자에게 양의 문이 되어주시었습니다.

요 10: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치유와 회복이 되는 문이 되시고 그 안으로 들어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상처받고 연약한 하나님의 어린 양들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를 보고 구원을 체험하고 영생을 맛보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을 이길 희망과 능력을 그 안에서 찾습니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거대한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절망스런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걷어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요 정의를 위한 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38년 된 오래된 상처와 절망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아픔이 있고, 깨어진 평화로 인해 대립하고 적대하는 증오의 마음도 있습니다. FTA라는 협정으로 경제를 삼키려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안팎으로 둘러쳐진 거대한 폭력들이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만을 구하고 누워있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의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예수의 길입니다. 예수의 길은 희망이고 모두가 사랑과 정의의 길을 걷는 사회를 향한 길입니다.

본문의 38년된 병자는 예수께서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씀 따라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말씀 따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기적의 연못에 들어가지 않고 말씀을 붙들고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고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 특별히 좌절하고 고통에 있는 사람들,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일어나 그 자리를 걷어 가지고 다시금 희망으로 치유와 회복으로 변화로 걸어가라 하십니다.

우리의 삶 주변에도 너무도 많은 희망과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처럼 치유와 회복,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과 공간에 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가 스스로 일어 날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능력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함께 해 주셨듯이 우리 또한 먼저 찾아가고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38년 된 상처와 아픔 절망으로 희미해진 사람들과 세상의 희망을 다시금 새롭고 더 뚜렷하고 확신 있게 변화 시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Title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 12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