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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의 주기도문 2. 누가 주는 양식을 먹고 있습니까?

마6: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박쥐’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어린 시절 TV에서 뱀파이어 영화를 보아서인지 박쥐하면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것처럼 생각되어 질 때가 있었습니다. 박쥐는 낮 동안에는 어두운 동굴에서 지내다 어두운 저녁이 되면 밖으로 나와 활동을 해서인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박쥐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두운 부분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2009년 박찬욱감독의 영화 ‘박쥐’에서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신부 ‘상현’은 자진해서 고칠 수 없는 바이러스 연구에 참여하였다가 감염됩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 흡혈귀 피를 수혈 받아 뱀파이어가 됩니다. 뱀파이어가 되어 병이 치유되는데 인간의 피를 먹지 않으면 급속하게 병이 재발합니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는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환자나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의 피를 먹습니다.

영화에서 귓가에 남도록 들려지는 소리는 피를 빠는 소리입니다. 인간의 피를 마시고 빨고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과 소리가 뱀파이어 신부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로 영화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주일 아침부터 19금 ‘박쥐’ 영화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가 정말 먹을 걸 먹고 먹지 말아야할 것을 먹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묵상해 보고자 함입니다.

오늘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하루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을 생각해 보면 이게 진정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쌀 한 톨에도 우주가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생각입니다. 쌀 한 톨을 내기 위해 태양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지구는 태양을 돌고,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가을걷이까지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자동차들은 밤새도록 도로 위를 달리고 시장 가게들의 불은 꺼질지 모릅니다. 식탁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수고하는 아내의 손길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 모든 수고와 노력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한 끼의 양식은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왠지 오늘 하루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식탁 앞의 제 자신이 자본의 매트릭스 안에 갇혀 오늘 하루의 양식을 받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곤 합니다. 이 자본의 거대한 매트릭스가 식탁까지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주기도문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 무엇인지 더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진 시대는 2000년 전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치, 경제, 문화를 통제하고 통치했습니다. 어느 학자는 처음 돈의 활용은 단지 숫자 세는 것에 불과했는데 BC 800년부터 현물처럼 쓰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도 군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인데, 전쟁에 참전한 용병들이 현물 교환권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돈의 가치가 형성되었습니다. 용병은 남성들로 이루어졌기에 돈의 소유는 가부장적인 사회로 굳혀졌고 결국 권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현물처럼 쓰여져 거의 완전하게 상용된 건 로마제국시대입니다. 제국 안에서 돈은 시장을 만들어 냈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숫자를 새는 것에서 시작된 돈은 오늘날 금융경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어 냈습니다. 현재 우리는 사람들의 피를 빨았던 용병들로 시작된 자본주의가 거미줄보다 더 복잡하고 견고하게 쳐 놓은 금융경제사회에 살게 되었습니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 한국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라는 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가치와 문화, 경제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단순한 음식을 먹는 삶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젠 우리 한국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먹는 것 자체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보는 건 ‘어디서 먹느냐? 무엇을 먹느냐? 누구랑 먹느냐?’입니다.

자본주의가 준 일용할 양식은 단순한 일용할 양식이 아닌 장소와 종류, 관계가 섞인 일용할 양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자연의 순환에서 추구해 온 하루의 일용할 양식이 자본이 주는 양식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자본시장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는 모든 씨 맺는 열매와 채소, 곡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고, 수많은 종자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종자의 멸종은 우리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학자 Jack Harlan은 밀과 쌀과 같은 종자들에 대해 “이 유전자원들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비극적인 규모의 기아와의 기로에 서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본시장의 더 많은 생산과 소비의 추구는 기후변화를 초래했고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인류가 맞을 식량위기를 점치게 합니다. 예를 들어 1800년 대 미국엔 사과의 이름이 7100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6800개가 멸종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최상의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사라져도 되지 않느냐? 그러나 최상의 것은 없습니다. 다양한 품종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성과 맛이 있고 자신이 가진 고유의 성장환경이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기후변화를 생각할 때 어떠한 품종이 살아남아 우리 인류를 먹여 살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자보존과 농업은 사라지면 안 됩니다. 다행인 건 세계 종자은행이 있다는 것인데 이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는 현실입니다.

아무튼 자본이 주는 양식은 유전자 조작이 되었고, 일률적으로 개량되었습니다. 병충해를 없애기 위해 농약을 살포하고, 심지어 살충제를 지닌 옥수수와 같은 식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한 농업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악마와 같은 자본시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본시장은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세계의 농업을 움직이고 통제합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는 지금껏 농업이 경험하지 못한 기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자본시장이 주는 양식이 언제 어떻게 우리의 식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칠 동안 중국이 극심한 스모그로 몸살을 앓고 있고, 바다 건너에 사는 우리에게도 해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오염 현상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 특히 미래세대의 일용할 양식에 커다란 비극을 상상하게 합니다.

자본의 양식은 채식에서뿐 아니라 육식에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3년 전 구약의 출애굽 당시 유월절악마가 지나간 후 모든 처음 난 생명들이 죽었던 것과 같은 구제역이라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 당시 한반도 전역에서 기르던 수많은 가축들이 눈물과 비명 속에 산 채로 땅에 묻혔습니다. 가끔 아이들과 통닭을 먹을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하는 생각은 수많은 치킨 집과 식당들에 배달되는 닭의 몸입니다. 그들이 사육되고 도살되는 과정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그럴때면 마치 제 자신이 영화 ‘박쥐’에 나오는 뱀파이어 신부가 되어 먹지 말아야 할 생명의 피를 빨고 있는 듯합니다.

숫타니파타에서 검은 악마의 공격군을 여덟 군대로 분류하는데 그 중 하나가 굶주림이라는 군대입니다. 이 굶주림의 두려움이 있기에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쌓아 놓으려 합니다. 하루는 아이들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으로 오염된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우리나라의 핵발전소에 사고가 나면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먹거리에 심각한 혼란이 올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10살 된 딸은 ‘그럼 핵발전소가 폭발하기 전에 나오는 음식을 모두 사서 장롱에도 쌓아놓고 냉장고에도 쌓아놓아야 겠네.’하며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핵발전소를 폐쇄하면 괜찮다며 어린 딸의 불안한 마음을 애써 없애주었습니다. 인간에게 먹을 것이 없다라는 건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시나 나의 미래와 자식들의 미래에 굶주림이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 자신이 다 쓰지 못하는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는 풍요의 시대 내일 먹을 것이 없어질 것이라 위협하며 더 많은 식량과 재물을 모으라고 유혹하며 달려드는 자본시장의 공격을 거부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을 위한 골방의 주기도문입니다.

골방의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시는 “오늘 하루에 필요한 양식”은 “우리”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배부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언제나 나뿐 아니라 공동체의 양식입니다. 골방은 홀로 하나님과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하나님과 만나는 골방에서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나만을 위해 기도하라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공동체를 위해 하루의 양식을 구하라 하십니다. 골방에서 자신을 비우고 몸을 비우고 지구생명공동체와 하나 된 배를 가지라 하십니다. 그리고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 하십니다.

제국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두 달째 접어 들 때 양식이 바닥났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배고픔으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쫓아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굶주림이라는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자신들이 추구하였던 샬롬의 세상은 잊어버렸습니다. 광야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이스라엘은 고통스럽게 죄어오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 양식을 위해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저 내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조건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 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출16:4) 배고픈 이스라엘에게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 날 그날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일 것”, 둘째는 “안식일엔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른 아침 안개가 걷히고 나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거두는 광야의 사람들 중엔 하루 양식이 넘치도록 거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여지없이 남은 음식은 썩어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아침 만나를 거두로 나간 사람들 또한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의 의미와 목적은 사람을 포함해 모든 땅에 사는 모든 생명의 쉼입니다. 자신이 선 자리를 지키고 보존하는 시간을 확보해 주는 날이 안식일, 안식년의 가장 큰 역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내어 주는 땅의 생명들에게 안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은 결코 땅을 쉬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석탄과 석유, 전기를 쓰며 봄과 여름에 나야하는 채소와 과일을 만들어 냅니다.

광야생활 하던 이스라엘의 일용할 하루 양식인 만나와 안식일은 철저하게 ‘나’가 아닌 ‘우리’, 곧 “지구생명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자본이 주는 양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는 우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나가야할 방향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자본이 주는 양식이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라며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자본시장이 주는 먹거리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분별하는 성찰과 실천, 감사와 나눔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루 한 끼의 식사 앞에 모든 공동체가 평등하게 먹었던 광야의 식탁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한 끼의 식탁을 하늘에서 내려지는 만나를 대하 듯 하고 우리 식탁 위 거룩한 희생들의 안식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가 주는 하루의 양식을 먹고 있는지 성찰하며 골방의 주기도문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루의 양식을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주간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눔의 실천과 깊은 영성과 생명의 밥상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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