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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안녕을 꿈꾸는 광야의 사람들
눅 1:67-80
67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69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70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72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73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74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75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78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한 대학가에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붙은 이후로 대한민국의 시국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모습이 사회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불법과 폭력을 보고 자신들의 생각과 삶을 이야기하며 외치는 젊은 친구들을 보고 있으니 묻어 두었던 대한민국의 정치에 희망이 생기고, 아기예수께서 다시 한 번 오시어 안녕을 묻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림절 마지막주일입니다.

자신들의 광야 같은 삶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서 평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정, 밀양, 비정규직·해고노동자... 이젠 말만 들어도 그들의 현장과 고민과 바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분들이 투쟁하고 해결되기를 기다리기 원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우리의 문제입니다. 제주 강정은 우리가 속한 동북아 평화에 대한 것이고, 밀양은 우리의 전등과 보일러를 가동하는 에너지생산의 안전에 관한 것입니다. 비정규직과 해고노동자는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노동과 그 권리에 관한 것입니다. 추운 겨울 날 아기예수님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민주적으로 해결되어 모두가 만족하고 자유 하는 그런 날이 너무나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모두 함께 누려야 하는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원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나와 이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날이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정의가 강물같이 공의가 하수같이’ 흘렀던 시대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이후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이루어 본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을까요?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교회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시대에 인간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이 이루어진 적이 있나요?

“안녕들 못한” 대한민국사회에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 시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청와대에 있습니까? 국회에 있습니까? 전경련에 있습니까? 교회에 있습니까?’ 북한의 2인자 장성택이 숙청당했다고 좋아하는 국정원 관리와 국가기관들의 불법적인 지난 대선개입 수사진행을 보면서 내 평생 맛 볼 수 있는 자유하고 정의로운, 평등하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가 저 만치 10년은 멀어져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나라를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불법을 불법이라고 말하며, 사회의 올바른 방향과 삶을 자유롭게 요구하고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권력은 자신이 섬겨야할 생명들을 억누릅니다. 그럴 때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인간의 내면은 자신의 본질인 자유하고 자 하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품게 됩니다.

장자의 양생주 편에 ‘우사의 자유’ 부분이 있습니다. [우사는 형벌을 받아 한 쪽 발을 잃었다. 우사를 여러 해 만에 만난 공문헌이 놀라서 물었다. “대관절 어찌된 일인가. 그 발은 잘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단 말인가.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우사가 대답했다. “놀라지 말게. 나는 형벌을 받았으나 그것은 사람의 힘이 한 일은 아니고 하늘이 나를 한 쪽 발만 가지게 했을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원해서 한 쪽 발만 가지고 태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한 쪽 발을 잃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뜻은 아닌 것이다. 자네는 들꿩의 기분을 아는가. 그들은 먹이와 물을 찾아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닌다. 고생스러우나 새장 속에서 편안히 길리려 하지 않는다. 배부르게 먹는 것보다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쪽 발을 잃은 뒤에야 참다운 자유를 알게 되었다.” 『장자』 일신서적출판사 79p

새장에서 길들여지는 새는 주인이 주는 먹이를 수고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가진 날개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죽어갑니다. 그러나 들판의 꿩은 고생스러우나 자유함 속에 살다 자유롭게 죽음의 장소를 선택할 것입니다. 새장 속의 새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고 알기까지는 새장 밖의 하늘을 보고 날아오르며 새장철장에 부딪혀봐야 합니다. 부딪치며 나는 상처와 아픔을 느끼고 좌절할 때 자신의 내면과 몸에 부여된 자유를 더 간절히 찾고 추구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를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정치권력자들의 불법과 거짓, 검찰의 편향된 기소와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잃어버리고 빼앗긴 자유를 더 확연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을 찾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시청과 대한문 앞에서 떨면서 맛보고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사가랴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광야로 내 보내면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68-74)

사가랴는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순간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사가랴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이 누릴 자유와 사랑이며, 평등과 정의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세례요한을 품고 “아가야!” 너는 그 약속을 이어받은 예언자다. 그러니 담대하며 강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살아가라 합니다.

아버지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 세례요한을 광야로 내 보냈습니다. 광야는 집처럼 보호받거나 편안한 안식처가 아닙니다. 광야에서는 들짐승과 도적떼, 궁핍과 맞서 싸워야합니다. 위험하고 고통스럽지만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내보내는 광야는 ‘예언자가 가야하는 길’이고,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는 곳’이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을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에 보내진 아기의 성장 앞에는 명예와 권력, 부는 멀고 가난과 궁핍과 수고로움이 가까이 있습니다.

영등포역 노숙인들 상담을 해주는 곳에 젊은 청년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전국의 신학교학생들이 시국선언 기도회를 한다고 하는데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시국선언에 동참하면 정말 취업도 못하고 어려움에 당할까요?’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청년들의 고민과 용기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국선언 했다고 뽑지 않는 직장엔 다녀도 재미도 의미도 없을 것 같다’고 대답은 했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오늘이 광야와 같은 정국이 아닐까하는 마음 지울 수 없었습니다. 불법을 불법이라 이야기하고 싶은데 취업걱정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의를 찾아가는데 부와 안녕은 멀어 보이는 현실입니다.

세례요한은 잉태하기 전부터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평탄케 하는 예언자의 길이었습니다. 예언자로 선택받아 태어난 아기가 내보내진 광야는 고독이 친구였고 그 고독 속에 꿈꾸고 기다린 세상은 메시야가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안녕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며 성장한 아기는 심령이 굳세어졌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서는 날까지 광야의 바람을 맞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견디며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서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모든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약속과 이룸을 확고하게 가졌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자유와 사랑, 평등과 평화가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였습니다. 아기 때부터 광야에서 성장한 요한은 감옥에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광야로 보내고 보내지는 늙은 아버지 사가랴와 아기 요한의 모습, 그들의 삶에서 오늘 대한민국의 광야 같은 세상과 그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야의 안녕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적인 사회가 용서되고 새로운 세상, 거듭난 인간으로 나가는 대한민국을 기대해 봅니다. 음지에 숨은 일베충들이 양지로 나오고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대한민국, 남과 북이 평화의 손을 잡은 한반도를 상상합니다. 비록 광야의 찬바람과 배고픔이 존재하는 오늘이지만 광야로 내보내진 아기 요한이 메시야의 마음,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더욱 굳세게 성장하듯 우리들과 우리 아이들이 성숙해져 “안녕들한” 세상을 이루며 갈 것이라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봅니다.

광야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 나라의 안녕을 꿈꾸었던 사가랴와 아기 요한처럼 성문밖지체들이 광야에 앉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메시야가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안녕을 꿈꾸고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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