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자료
2016.01.11 18:50

2016.01.10. 성문밖 주일설교

조회 수 174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2016.01.10. 성문밖 주일설교

제목: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본문: 이사야 431-7; 사도행전 84-24; 누가복음 315-17, 12-22

 

페이스북에서 본 이야기 하나 들려드립니다. 이야기의 제목은 상업적 종교는 희망 없다!’였습니다. 어느 교수님이 강화도의 유명한 사찰에 갔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식당 메뉴판처럼 생긴 안내판을 보게 됩니다. 식당 메뉴판 보셨지요? 왼쪽엔 음식이름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 가격이 적혀있지요?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수험생을 위한 기도 00000, 백일기도 0000000, 건강기원 000. 각종 기도를 스님이 대신 해줄 테니 그에 맞는 시주를 하라고 안내하는 안내판 이었던 겁니다.

 

흔히 기독교는 타력구원, 구원이 자기 밖으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력구원, 즉 구원이 자기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분이 전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돈을 취하는 종교의 행태가 한심하다고 쓰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태가 비단 절에서만 일어나는 문제인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지 않는가? 신앙을 자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또는 삼으라고 가르치고 조장하는 모든 행태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절에 다녀온 교수님의 소회였습니다.

 

신앙을 사고파는 상품처럼 취급하는 이 비슷한 일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중, 사도행전 8장에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 순교자가 나오고 사도들이 흩어지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자 사도들은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 중 한 명이 사도 빌립입니다. 빌립은 그 당시 유대에 속한 지역이지만 이방의 지역처럼 취급해온 사마리아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빌립은 복음을 전파합니다.

 

빌립의 전도로 제자가 된 사람 중에 시몬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마술을 보여주어 사마리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시몬도 빌립의 선포를 받아들여 제자가 되어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사마리아에 제자들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사마리아로 내려온 두 사도는 제자가 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여 성령을 받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 시몬은 돈을 내며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내게도 손을 얹으면 성령을 받게 하는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사도들의 권능을 돈으로 사고 싶다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했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 그러므로 그대는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오. 내가 보니, 그대는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소.”

 

그 말을 들은 시몬이 뉘우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말한 것이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 사건은 교회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돈으로 사려했던 시도로서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중세, 교회가 세속의 권력까지 장악했던 시절에 교회의 성직을 돈으로 사려는 부정한 행위들이 생겨났고 이런 행태를 가리켜 성직매매'라고 하는데 이것을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시모니, simony 또는 Simonie’’라고 부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한 개인의 이름, 고유명사 시몬성직매매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된 겁니다.

 

시몬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성령을 돈으로 사고자 했습니다. 시몬은 성령을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시몬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과거에 마술을 행할 때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했으니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바꾸려는 태도가 상업주의입니다. 상업주의의 뜻을 사전으로 보면, 문화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에 종속시키는 태도라고 나옵니다. 성령을 사고자 했던 시몬의 태도는 종교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에 종속시키려한 종교적 상업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의 근본에는 소유가 곧 존재를 결정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아파트 광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아파트 평수와 가격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등급을 결정한다는 말, 곧 인간의 소유가 곧 존재를 결정한다는 상업주의적 프로파간다입니다.

 

바로 이런 프로파간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소유가 곧 존재라는 메시지는 교육을 지배합니다. 교육에서 말하는 경쟁력 있는 인재란 돈이 되는 인재를 말합니다. 교육은 돈이 되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소유가 곧 존재라는 메시지는 종교도 지배합니다. 종교에서도 복이란 물질의 복을 의미합니다. 종교 역시 물질적 소유를 늘리는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소유가 곧 존재라는 기준은 내가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고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내게 돈이 없으면 위축됩니다. 위축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모로서 돈이 없으면 자식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 사람의 배우자로서 돈이 없으면 상대 배우자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나와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소유가 아닌 다른 기준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유는 얻고자 하는 욕망인 동시에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불안의 근원입니다. 이 같은 불안을 해소하려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일과 학문과 신앙의 동기가 모두 불안과 욕망입니다.

 

그러나 일이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지 못할 때 소외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일 자체의 의미도 왜곡되고 그 일을 하는 인격도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마음에 진정한 의미에서 성실함이나 신실함과 같은 인격적 요소가 성장하거나 고양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있던 인격도 일을 하면서 점점 사라집니다. 일을 할수록 더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추한 사람이 됩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수단으로 취급될 때, 공부도 의미를 잃고 공부하는 사람의 인격도 파괴됩니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공부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공부할수록 더 나쁜 인간이 됩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해악을 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공부 많이 한, 공부 잘 한 사람들입니다.

 

종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면 그처럼 추한 것이 없습니다. 종교가 욕망과 불안을 근거로 할 때 종교는 가장 추한 것이 됩니다. 불트만은 미신을 정의할 때, 불안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신은 특정한 종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나 불교처럼 세상에서 소위 고등종교라고 부르는 종교도 얼마든지 미신이 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처럼(딤전610) 소유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메시지는 모든 것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마저 맘몬의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게서 하나님을 없애 달라고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I pray God to rid me of God.” 하나님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다니, 모순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없애려고 하는 하나님은 내 불안과 욕망이 지어낸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왜곡된 상일 겁니다.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했으니 그대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소유가 곧 존재라고 믿는 그대는 그대가 그리 중히 여기는 소유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오,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이 있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소유를 증대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해 왔으나 이제는 그것의 허구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곧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존재에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일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해, 소유를 위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입니다. 공부도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처럼 왜곡되어 있지만 공부는 존재를 고양시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종교는 시종일관 존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소유를 다 잃어버린다고 해도 존재를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유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삶 자체를 왜곡시켜 삶의 목적인 행복에 전혀 도달할 수 없게 합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포하신 겁니다. 회개하라 metanoia 삶의 방향을 바꿔라! 종교는 소유가 아닌 존재를 말합니다. 소유를 말하는 상업적 종교는 미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구약 성경 이사야 43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이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이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믿는 사람이 모든 환란을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신앙이 모든 환란을 피하는 도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길 바랄지 모르나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네가 누구인지 알라는 말씀입니다. 너를 창조하신 분, 너의 삶을 조성해 가시는 분이 누구인지, 곧 너의 운명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네 존재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무너졌는가? 무너진 이스라엘이 어떻게 다시 설 수 있는가?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소유가 아닌 존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창조했는가? 누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가? 이것을 바르게 알 때 무너진 이스라엘이 다시 설 수 있고, 포로 된 이스라엘이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하는 겁니다.

 

오늘의 세 번째 본문인 누가복음도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일생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께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이 말씀이었습니다.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집 한 칸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그가 사랑했고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끝까지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소유의 측면에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예수를 구원자,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소유가 곧 너의 존재라는 세상의 메시지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소유를 증대하는 방식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여전히 온통 네 소유와 업적으로 너를 증명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보혜사 곧 도우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생각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모두가 소유를 추구하는 방식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이루려 할 때, 성령은 우리에게 존재를 추구하게 하시고 존재로써 소유를 초월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소유에 집중하도록 소유에 매몰되도록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지금껏 늘 반복해온 방법이지만 실패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일도 공부도 신앙도 온통 소유를 추구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일과 공부와 신앙은 우리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소진시켜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 것은 그가 모은 소유도 아니가 그가 이룬 업적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때, 그것을 본 겁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우리의 소유에 있지 않고 우리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본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곧 우리 자신이라는 거짓된 메시지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소유를 존재와 동일시하는 세상의 메시지를 거부하게 하시며 소유의 관점에서는 이룬 것이 없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인류가 지금껏 얻고자 노력했으나 결코 얻지 못한 행복의 길이 예수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기뻐하는 존재라는 하늘의 음성을 일생 마음에 간직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곧 소유가 아닌 존재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길을 스스로 걸어가시고 또한 이 길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Title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37 Next ›
/ 3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