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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5 18:32

2016.01.24 성문밖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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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4. 성문밖교회 주일설교

제목: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 느헤미야 85-12; 누가복음 414-21

설교 후 찬송: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가 96

 

주전 587년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합니다. 주요한 인물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 50년 뒤, 주전 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는 서로 다른 종교정책을 썼습니다. 바벨론은 정복한 민족의 신전을 부수고 신상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정복한 민족의 종교를 존중하고 그 민족의 종교를 자국의 종교로 수용했습니다.

 

이런 정책에 따라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주전 538년 바벨론의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과 성전재건을 명합니다. 이것이 고레스 칙령입니다. 고레스 칙령에 따라 1차로 귀환한 자들과 총독 스룹바벨은 성전을 재건합니다. 이것이 성경 에스라 1-7장의 내용입니다.

 

그 후 80년 뒤, 주전 4582차 귀환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율법학자 에스라가 함께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의 종교전통을 되살립니다. 그 후 13년 뒤, 주전 445년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가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합니다. 이것이 성경 느헤미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성벽이 재건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학자 에스라에게 율법을 읽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것이 칠월 1일인데 이 날은 유대인들의 설날입니다. 무너진 성전과 성벽이 재건된 후 첫 설날에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듣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자 학사 에스라가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 앞에 서서 율법을 읽습니다. 그러면 레위인들은 에스라가 읽어주는 그 율법을 백성들에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율법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고 당시 백성들은 아람어를 썼기 때문에 번역해 주어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읽어준 율법의 내용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계시는 수용되기 전에는 계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합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한 후 에스라가 읽어주는 율법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모두 울었습니다. 그들은 왜 율법을 듣고 울었을까요? 이전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던 율법이 왜 그날은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들었을까요?

 

바벨론 포로기라는 실패와 좌절을 겪고 난 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율법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습니다.

 

율법이 들리는 것도 들을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바탕은 고난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고난을 통해 삶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이전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율법이 들리게 되는 바탕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며 또 역사적으로 여러 번 판명된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119,71).”

 

율법을 듣고 우는 백성을 에스라가 격려하며 울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슬픔이거나 죄책감이 아니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들으면 그 계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기의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나면서 슬프거나 죄책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율법의 본래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마르티아Hamartia입니다.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과녁은 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란 자기의 행위가 자기의 본성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존재와 행위가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된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분열된 자기를 발견하는 일은 슬플 수도 있고 죄책감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은 슬픔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죄인은 이미 자기의 죄를 극복하는 죄인입니다. 율법은 분열된 자기를 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슬픔과 죄책감을 불러 일으킬 수 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분열을 본 사람은 이미 자기의 분열을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죄인은 이미 자기의 죄를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슬픔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기쁨입니다. 현재의 분열된 자기와 죄인된 자기를 넘어서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쁨입니다. 율법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또한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하는 법이기 이전에 그 법을 요구받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해줌으로써 거짓된 자기 정체성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전태일이 노동법을 발견하고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라는 법의 문구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태일은 노동법을 통해서 노동자가 단순히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기뻐한 겁니다. 전태일은 노동법을 통해서 자신도 오해하고 있었던 왜곡된 자기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 중에 대표적인 율법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안식일법입니다. 안식일 법은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말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일하지 말라는 법입니다. 동물조차도 일하지 말라는 법입니다. 완벽한 일상의 정지를 명령하는 법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일상을 완벽하게 정지할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노자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말처럼, ‘숙능탁이정지서청이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상의 완벽한 정지, 곧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음을 통해 일어나는 정화의 사건, 그것이 곧 안식일 법의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일 법은 쉼과 정지를 통하여 나를 끊임없이 소진시키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나고 그 일상이 나를 고양시키는 일상으로 새롭게 창조되도록 만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 법은 그 법을 지키도록 요구받는 인간의 본질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은 자기의 삶에 대한 성찰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삶의 매순간을 창조와 해방의 시간으로 만들어 자기를 새로운 존재로 자유로운 존재로 고양시켜 가는 존재라는 겁니다.

 

모든 율법의 목적이 사실상 이와 같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물하는 복음입니다. 이 자유와 해방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 되는 목표였습니다.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인 누가복음 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설교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는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육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을 찾으신 이유는 예배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회당 예배의 순서가 대략 1. 쉐마(Shema)의 암송(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 2. 기도 / 3. 율법과 선지서의 낭독 / 4. 설교 / 5. 축도(아마도 대제사장 축복문,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인데, 예수님은 바로 이 예배의 34를 담당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펴신 곳은 이사야 61장의 본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갇힌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기름을 붓는 것은 어떤 사람을 선지자로 세울 때, 제사장으로 세울 때, 왕으로 삼을 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 부은 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또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삶을 통해, 또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포하셨다는 고백입니다. ->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참된 삶의 길과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를 위한 고난과 죽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모든 고난과 죽음이 우리 모두와 무관하지 않다는 통찰에 이릅니다. 그리고 예수의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우리를 에워싼 삶의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과 교회를 보존하고 다스리신다는 고백입니다. -> 예수님을 따를 때만 세상과 교회는 존재를 지속해 갈 수 있고 존속할 가치가 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을 설교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삼으신 그리스도인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절대 다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정하셨습니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무능한 것이고, 무지한 것이라고 믿는 오늘날, 말도 안 되는 선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긍정하신 가난을 부정하는 세상과 교회, 가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세상과 교회, 가난을 무능과 무지의 결과로서 폄하 하는 세상과 교회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따라서 살아야 할 왕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시대정신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인간을 관계가 아닌 개체로서 흩어버리고 서로가 상생하는 것이 아닌 경쟁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시대정신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대정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시대정신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같이 승리하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에 싸여 사는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육체적 존재임을 긍정하셨습니다. 육체는 분명히 여러 가지 고통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 고대에는 육체를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철학과 종교들이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약함을 긍정하셨고 인간의 역사를 또한 긍정하시며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도 육체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백성들을 억압하는 헤롯을 비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사회적인 삶을 일깨우는 선지자로서 하신 일입니다.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예수님은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사람의 자유를 억누르는 많은 제도와 상황이 존재합니다. 저는 지난 주 3일간 독일에서 자원봉사자로 온 루이자라는 여학생과 동행했습니다.

 

첫날 루이자와 함께 찾아간 곳은 성공회 대학교 예배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신영복 선생님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이유로 자유를 빼앗긴 이 사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둘째 날에는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매일 같이 피케팅을 이어가는 홍대 입구를 찾았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은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진실규명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이 사회의 대표적인 그룹입니다. 셋째 날에는 벌써 25년째 시위를 이어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요 집회를 찾았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국제정치의 이해관계 때문에 억울하다고 말할 자유조차 억압당하는 이 사회의 대표적인 그룹입니다.

 

우리의 선지자이신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은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님을 선포하신 겁니다.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이런 우리 사회에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억압하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런 우리 사회에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여 자기의 살길을 도모하는 방식은 세상을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그런 세상은 보존될 가치가 없다는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받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슬픔과 죄책감에 빠뜨리는 법이 아니라 우리를 현재의 왜곡된 정체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케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통해 법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요구받는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해 줄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깊이 생각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메시지에서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죄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으로부터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배웁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이 시대 고난 받는 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배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보존될 가치가 있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를 배웁니다.

 

우리 모두에게 율법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새롭게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받은 모든 계명을 법으로 받지 않게 하시고 그 계명을 요구받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세상에서 왜곡시킨 거짓된 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해주십시오. 주님, 주님은 우리의 선지자이시니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참된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주님은 우리의 제사장이시니 이 사회의 왜곡된 구조 속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 역시 이 시대에 고난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들의 삶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에게 보존되고 지속될 가치가 있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통한 아름다운 교제가 율법을 법이 아닌 복음으로 받아 안기를 다짐하며 주 예수를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믿어 참된 삶의 길을 배우며 고난의 의미를 배우고 보존될 가치가 있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소망하는 성문밖 식구들 모두의 삶 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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