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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9 11:46

2015년 12월 6일 성문밖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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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6. 성문밖 주일설교

제목: 사가랴의 찬가,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본문: 누가복음 167-80

 

크리스마스의 이야기,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성인이 된 이후의 예수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승하고 있는 복음서는 네 가지입니다. 핵심에서는 같지만 각각의 신학적 입장이 조금씩 다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자의 특징적인 신학적 입장에 따라, 또는 각자가 처한 질문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자료들을 사용했습니다.

 

아기 예수가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저자가 대답할 필요가 없었던 어떤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를 느꼈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아기 예수 이야기를 복음서의 서두에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주제도 아마 그것이 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두 복음서 모두 나오는 이야기는 마리아 수태고지,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천사가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내용은 누가에만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는 동방박사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해 먼 동방으로부터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학자가 아니라 왕이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제가 예전 드레스덴이란 도시를 방문했더니 그곳에 있는 한 교회 이름이 Dreikönigskirche, 세 왕의 교회였습니다. 함께 그곳을 방문한 제 친구들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든 일에 아는 체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제 아내만이 대답을 하더군요. 교회의 세 왕이 누구겠어? 성부, 성자, 성령이지! 그럴듯하지요?

 

그러나 마침 교회를 안내하는 독일인이 있어 그에게 물어보니, 제가 익히 아는 동방박사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의 성경에 기록된 동방박사들이 세상에 참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세상의 왕들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일컫는 말은 신학에선 삼위일체라 하고 삼위일체를 상징으로 삼는 교회의 이름은 Dreieinheitskirche, 즉 삼위일체교회라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 생각이 났습니다.


누가복음엔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자세히 나옵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의 탄생예고, 마리아 수태고자, 마리아 찬가, 세례요한의 출생, 사가랴의 찬가, 그리고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난 이유가 로마황제의 호적 명령이 있었다는 이야기,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들, 목동들에게 둘러싸여 아기 예수가 경배 받는 이야기 등 누가복음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자세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중에서 세례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터져 나온 사가랴의 찬가를 가지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어른 예수만이 아니라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사가랴의 찬가를 남긴 사가랴는 누구일까요? 사가랴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엘리사벳의 남편, 이스라엘의 제사장, 그 중에서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는 매주 진행되는데, 그것을 담당할 제사장 그룹은 24조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각 조는 일 년에 두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게 되고 각 조에서 제비를 뽑아 성소에 제물을 바칠 제사장을 정했다고 합니다.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으로서 어느 해 어느 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제비뽑기 결과에 따라서 성소에 들어가 제물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러 들어간 성소에서 사가랴는 주의 사자를 만난 겁니다. 사가랴는 두려워했습니다. 이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보인 반응과 같고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후 느꼈던 그 느낌과 같습니다. 하나님 경험의 한 측면이 두려움이라는 겁니다. 표면적인 일상을 관통해 버리는 심층적 경험 앞에서 일어나는 두려움 같은 겁니다.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말하길, “네 기도가 응답되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으로 하여라, 그 아이는 독주를 마시지 않는 나실인처럼 성장할 것이고, 그 아이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할 것이다.”

 

사가랴의 아들 요한은 태어나기 전, 그가 세례요한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 곧 돌이킴의 세례를 베풀기 전, 이미 그 일을 일생의 과업이자 사명으로 부여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일까요? 엘리야는 열왕기상 17장부터 등장하는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시대였습니다. 온갖 우상들이 판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오늘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큰 사건이 터져도 다른 사건들로 앞의 사건을 덮어 버리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 그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처럼, 그 옛날엔 수많은 우상의 이름들이 난무하게 만들어 참된 신을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신에 대한 관심 자체를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엘리야가 나타나 당시 이스라엘의 진정한 하나님 추구와 하나님 신앙을 미혹하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에서 만나 한 판 대결을 벌입니다. 제단에 장작과 제물을 쌓아두고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쪽이 이기는 목숨을 건 대결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자기 몸에 자해하기까지 격정적인 의식을 치렀으나 결과는 헛물만 켠 것으로 끝나자 이번에 엘리야가 나서 제단에 물을 붓습니다. 자연발화의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기가 참 선지자인 것을 알리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상 18, 37절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겨루던 그 비장한 순간에 자기 연민이나 자기 과시에 빠지지 않았고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도 바로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겁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기와 아내가 모두 늙어서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사가랴에게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도 누구보다 간절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계시를 받자 믿지를 못하는 겁니다. 계시는 계시를 받는 자가 믿음으로 수용하는 일이 없으면 계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자는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종종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모든 고난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그러니 고난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라고, 믿음을 잃지 말라고 자주 설교합니다. 그러나 막상 실제적인 고난 앞에서는 저 역시 무력해지는 제 모습을 봅니다. 사가랴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이 아직 온전히 제 안에서 육화되지 못한 저의 실상이 자주 실제적인 고난 앞에서 드러나곤 합니다.

 

제사를 마치고 성전에서 내려온 사가랴는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하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말을 못하게 된 사가랴는 그 긴 침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그 긴 침묵 속에서 사가랴는 많은 말들을 하나님과 주고받았을 겁니다. 내적인 투쟁이 일었을 겁니다. 이것은 계시가 사람에게 수용되기 위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과정입니다.

 

드디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두가 기뻐했고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주고 이름을 짓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려고 했는데 모친 엘리사벳이 요한으로 하겠다고 말했습다. 엘리사벳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가랴와 같은 계시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친척들이 말하기를, 너의 친척 중에 그런 이름이 없다고 말하니 말 못하는 사가랴도 글로 써서 요한이란 이름으로 하자 합니다. 그렇게 잉태된 아이의 확정되는 순간, 사가랴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순간,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그 순간은 믿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선으로 인도하실 하나님,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는 영광의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실 것을 믿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부정적인 현실 앞에서 그 모든 부정적인 현실을 하나님의 긍정이 압도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용기를 결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곧 무한하신 하나님의 계시가 유한한 인간의 삶에 육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사라랴의 입이 열리고 그의 혀가 풀려 찬송의 예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본문 67절을 보니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언이란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이란 자기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말을 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자기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가랴에게 전격적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성경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게 하고 전혀 다른 것을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영의 활동을 말합니다. 사가랴는 이전에는 결단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사가랴는 68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사가랴의 예언 전체를 들어보면, 그 내용은 결국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셨다!" 사가랴는 마치 그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완료형으로 선포합니다. 시제가 분명한 루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찬송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셨도다! 라고 보다 분명한  완료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미 성취되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이미 왔다면 그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나 어디 세상이 변했단 말인가? 그렇게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왔다는 주장과 아직도 변하지 않는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를 말하고, 아기 요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는 어떤 존재입니까?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기는 역사 속에 들어온 존재이지만 아직 역사화 되지 않은 존재다!” 아기는 인간이지만 아직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실현하지 못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도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시작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처음과 나중, 곧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가랴는 누구보다 아들을 원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했지만 막상 그 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늙어서 아들을 얻을 희망을 가질 수 없었을 때, 아들을 얻게 되면서, 자기의 기대를 넘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하나님은 자기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신다. 인간은 그 구원을 받아들일 뿐이고 또한 그 역사에 참여할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게 된 겁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 아기 요한을 보면서.


그리하여 사가랴는 자기의 아이를 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서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 주의 백성에게 죄 사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아라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문밖 교우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 오심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아기로 오신 평화의 왕, 아기로 오신 세상의 구원자를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이들의 현실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되고 만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 그 믿음에 자기의 운명을 거는 사람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역사와 이 현실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을 믿으며 그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이미 오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무력하기 그지없는 아기를  평화의 왕으로 믿는, 세상의 도움 없이는 생존조차 어려운 아기를 세상의 구원자로 믿는 세상이 받지 못할 역설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시면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모든 부정적인 현실 앞에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과 같은 현실에서 조차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사가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이러한 믿음과 이 믿음에 근거한 삶의 용기가 2016년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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