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089 추천 수 0 댓글 0
Atachment
첨부파일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라
로마서 5:1-11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또는 '자랑합시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또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6월은 현충일을 더불어 국가적으로 평화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는 달입니다. 그래서 6월 한 달을 평화와 생태적인 삶을 살아가는 달로 정하고 말씀을 묵상해 보려 합니다. 먼저는 평화가 필요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곳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을 하면, 나와 공동체, 그리고 사회, 국가 더 나아가면 온 우주의 생명체들에게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평화일까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어떠한 평화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속한 나라와 상황에 따라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 현 이스라엘과 그 국민들이 생각하는 평화와 팔레스틴의 국민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평화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제국의 평화는 언제나 군사력으로 나라와 국민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평화입니다. 이러한 평화는 예수 시대의 로마제국의 평화와 같은 것으로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하게 됩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정치 권력자들과 경제 부자들의 지위와 재산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거짓평화입니다. 반면 예수의 평화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예수의 평화는 편견이나 소외가 없이 가장 연약한 생명이 중심이 되어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모든 생명들이 들어주고 실천하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이야기할 때 개인에서 시작하여 우주적인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예수의 평화를 따르는 예수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나를 넘어 공동체, 사회와 국가, 온 우주에 예수의 평화가 이미 이루어졌고 다가오고 있음을 확고하게 느끼고 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는 자신의 평화를 이루고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아동의 성장단계를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 잠복기, 생식기로 구별하였고, 로저 코우드 박사는 성인의 발달 과정을 도망의 시기(16-17), 탐색의 시기(18-22), 투쟁의 시기(23-28), 회의의 시기(29-34), 불안의 시기(35-43), 회고의 시기(44-50), 성숙의 시기(50-)로 나누어 분석하였습니다.
  
이렇게 심리학자들이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이나 성인에 상관없이 인생은 자신의 환경과 성장의 시기에 따라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를 복잡하면서도 불확실한 사회로 규정합니다. 확실히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내일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갑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속한 오늘의 서울 한 복판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불안은 고용에 대한 겁니다. 한국 사회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실업과 퇴출, 비정규직 등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고, 갖지 못하는 경우를 수 없이 보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우리들의 일자리 환경은 딱히 좋아지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전은 물론 가족, 친구, 이웃들의 안전과 고용에 대한 불안은 삶의 자리에 있는 평화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평화까지 송두리째 앗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인생의 평화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깨어졌을 때 오는 절망과 불안감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끝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접하면서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변함없이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예수의 평화는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평화가 깨어질 때가 언제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먼저 저의 경우를 살펴보면 어떠한 일이나 누군가에게 분을 품고 화를 낼 때 내 마음과 몸에서 평화는 쉽사리 사라져 저 멀리 있는 듯 보입니다. 내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이 드러나거나 어떠한 일로 비난을 받을 때, 그리고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교우들의 삶의 어려움들이나 신앙의 연약한 모습을 뒤 늦게 접했을 때, 하루의 삶이 진행 되고 있을 때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저의 내면의 평화는 여지없이 부서지고 맙니다. 이러한 저를 조용히 성찰해 보면 내 감정과 이성에 치우쳐 추구하고 누리는 평화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가 누리고 싶은 평화는 세상의 어떠한 변화와 상황이 내 몸에 찾아올지라도 흔들림 없고 변함없는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생명들의 작은 존재와 움직임에도 감동하고 그들과 평화를 추구하고 함께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감정과 이성과 환경에 치우쳐 누리는 평화는 잠시잠깐이면 사라지거나 파괴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감정과 이성, 환경에 제한 받지 않는 예수그리스도가 추구한 평화가 존재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 하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먹을 때나 잠잘 때나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는 제 안에 함께 계셨고 저는 그분이 제 안에 함께 계심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연약한 삶 속에 평화가 깨어진 순간이 찾아올 때면 언제나 제 영혼의 귀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라’ 는 소리가 있습니다. 화를 내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환경은 그대로이지만 믿음의 귀가 열리고 그 소리에 귀 기울 일 때면 혼란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변하지 않고 나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안한 현실과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제 영혼을 감싸고 있는 예수라는 그 이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신비한 힘이 저를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가끔 제 자신을 보기에는 불안해 보이고 조급해 보일지라도 분명 제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그분의 평화가 깃들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본문을 쓰고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이라는 환경아래에서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불안했고 더 없이 위태로웠습니다. 박해를 피해 카타콤, 즉 지하동굴을 파고 예배를 드리고 궁핍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카타콤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던 어려움을 생각하면 지금 제가 경험하고 있는 불안이나 갈등, 문제들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하게 보일 뿐입니다.

카타콤의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의 양은 적었고 거칠었습니다. 그리고 잠자리는 언제 로마 군사들이 들이닥칠까 불안했습니다. 밖으로 외출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통제된 상황이었습니다. 발각되거나 잡히기라도 하면 사자 굴에 던져져야 했고 십자가라는 끔찍한 형틀에 못 박혀 죽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하 동굴 속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변함없이 존재하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에게로부터 받은 평화는 외부의 어떠한 힘과 권세로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카타콤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억압과 핍박으로 죽음이 문턱이 있는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자리라고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극심한 고난이 있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했습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로마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통치 아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렸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환란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을 자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을 자랑한다는 것은 환란 중에도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감사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여기 우리와는 별 다를 것이 없는 몸들입니다. 그들이 겪는 아픔과 누리고 싶은 평화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이 찾았던 변하지 않는 감사는 자신들을 향해 실증 되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신앙 선배 중에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일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의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편지의 내용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신뢰로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지켜내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함께 동참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동인 어머니에게!
병고 중에서 얼마나 신음합니까?
이 같은 염천에 고열도 심한데, 게다가 병고까지 있으니 설상가상입니다.
그러나 신애와 진리는 기후와 환경을 초월하니, 안심하소서. 꽃피고 '
새우는 양춘가절에만 신애가 있을 뿐 아니라 백설이 분분한 엄동 혹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며, 오곡백과가 성숙하는 가을 9월에만 하나님이 있을 뿐 아니라,
한천출배를 이루는 이 같은 염천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며,
금전옥루에서 산해진미를 먹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할 뿐 아니라,
수간두옥 속에 기한질고 중에서도 신의 사랑을 찬양할지니,
항상 기뻐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소서. 당신의 신앙이 능히 병고를 극복할 것을 믿고,
나는 안심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도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와 지혜는 나중에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에 영화가 된 까닭이외다. 사람의 영화는 최후를 보아서 알고,
참다운 지혜는 죄악을 떠남이 참 다운 지혜이겠나이다.
안심과 희락은 만병의 보약이오니,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고 부디 병석을 떠나소서.
1943(소하18)년 8월 18일 손양원

손양원 목사님이 겪은 환란은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과 지속으로 인내를 낳았고, 인내는 단련되어 그의 인격을 성장시켰고, 성장한 인격은 희망을 낳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잃는 가운데서도 인내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젊은이를 양아들로 맞아들였고, 나병환자들의 상처를 만지고 빨아내며 자신의 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분의 인격은 예수 안에서 환란을 견디고 감사했던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인격을, 인격은 희망이 되어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사랑을 실천한 그리스도인으로 존경을 받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진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확증이고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굳어버려 마음이 없는 교리나 내세만을 추구하며 자신들만의 구원을 외쳐대는 이기적인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을 통해 부어진 사랑은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영혼과 몸에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선물해 줍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죄 가운데 살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여 평화를 파괴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흘린 피로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 되어 있는 생명이라고 확고하게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10절)

카타콤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를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하나님과의 화해를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며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평화를 누리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그 옛날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지금 이곳에 계시며 우리로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실증됨을 증언하십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내면의 평화를 갖기 위해 여러 수행들을 하곤 하는데 백골관 수행이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ex) 백골관 수행
옛날 수도자들은 인생의 무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 "백골관" 혹은 "부정관(不淨觀)"이란 수행방법은, 먼저 수도자들은 산이나 묘지로 찾아가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송장 곁에 가서 자리를 잡습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송장을 마주 내려다보고 앉아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데, 썩어가는 시체를 보는 데에도 그 순서가 있으니 구상(九想)이라 합니다.
①죽은 자의 육체가 부풀어 팽창하는 것   ②검푸른 곪기에 엉기는 것
③썩어 뼈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  ④머리털과 피부가 바람에 날려가고 백골이 노출하는 것 ⑤그것이 풍화사산(風化四散)하고  ⑥나중엔 흙으로 돌아가 뼈와 살은 흙으로 화하고
⑦피는 물로 화하고  ⑧열은 불로 돌아가고  ⑨숨(호흡)은 바람으로 화하는 것.
이쯤 되면 시체가 곧 나요, 내가 곧 그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욕심낼 것이 무엇이며, 자랑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아니 그것이 인간의 실체일진대 당신이 자랑하는 학벌, 재산 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생각되고 느끼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chsoohw?Redirect=Log&logNo=120112296917

이러한 수행법과 생각은 한 인생이 죽음이라는 실체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인생의 모든 복잡하고 불안을 사라지게 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내면의 평화를 위해 어떠한 생각과 수고와 수행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많은 수행과 사상을 따라 평화를 생각하고 누릴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불안과 공포, 아픔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를 통해 보여 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현재 겪는 아픔과 슬픔이 있을지라도 감사와 자랑거리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고 변함 없는 사랑으로 평화를 누리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환란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우리의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낳는 희망은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자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 이루며 함께 누리게 할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서 있는 곳마다 평화가 자리하게 되어 홀로 있을 때나, 가족이나 동료들, 어디에 있든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97 주보자료 2010년 10월 17일 주보입니다. file 유영기 2010.10.16 2120
396 말씀자료 2011.3.20 주일설교 "노예들의 연가" 시편126:1-6 file 고성기 2011.03.26 2114
395 주보자료 2010년 10월 3일 주보입니다. file 유영기 2010.10.02 2112
394 말씀자료 2013.11.3 주일설교 "골방의 주기도문2. 누가주는 양식을 먹습니... file 고성기 2013.11.07 2111
393 말씀자료 2013.10.27 주일설교 "골방의 주기도문 1 하늘이 땅에 공감하다" ... file 고성기 2013.11.07 2110
392 기타자료 자본론 공부3_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 file 헤롱샘 2015.07.08 2097
» 말씀자료 2011.6.9 주일설교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라" 로마서5:1-11 file 고성기 2011.06.24 2089
390 주보자료 2010년 3월 28일 주보입니다. file 유영기 2010.04.02 2088
389 주보자료 2013년 3월 주보입니다.(4~5주) file 김규중 2013.10.05 2087
388 말씀자료 2009년 6월 14일 설교 file 손은정 2009.06.17 2086
387 말씀자료 2012.2.5 주일설교 "하늘을 열어 보이시는 하나님" 에스겔 1:1-3 file 고성기 2012.02.06 2072
386 말씀자료 2012.10.14 주일설교 "꿈꾸고 그리는 하나님 나라의 들판" 막 4:2... file 고성기 2012.10.16 2071
385 말씀자료 2011.2.13 주일설교 "무지개가 보고싶다" 창 9:8-17 file 고성기 2011.02.14 2069
384 기타자료 주현절 묵상1 김희룡 2015.01.27 2069
383 기타자료 창조신앙 김희룡 2015.01.18 2068
Board Pagination ‹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 37 Next ›
/ 3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