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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2110-11(예루살렘 입성); 2636-39(겟세마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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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교회력에 따라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35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이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여러 절기 중에서 특히나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중에서도 고난주간은 불과 일주일에 불과하나 이 기간에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들이 매일매일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주간에 일어난 일들을 듬성듬성이라도 언급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려면 이 기간만큼은 교회가 매일매일 모여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만 모이는 만큼, 고난주간 예수님의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선 최소한 두 가지 사건, 즉 오늘이 종려주일인 만큼 종려주일의 사건을 언급하고 그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 예루살렘 입성 이후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으로 행하신 겟세마네의 기도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려주일과 몰락의 의미

오늘은 종려주일이라 불립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론 예수님의 커리어가 절정에 도달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열망과 기대 그리고 열렬한 지지가 최고조에 도달한 시점이었습니다.

 

본문의 11절과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12: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 비록 간략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 당시 예수에 대한 기대가 온 도시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음을 짐작케 해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은 예수님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하늘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곧바로 시작되는 일몰과 같았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님은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했고, 자기를 지지하던 군중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며, 홀로 남겨져 체포되었고, 투옥되어 재판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대단히 급격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몰락이란 사태는 누구나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일이며 그것이 자신과 관련될 때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누구라도 꺼리고 두려워하는 바로 이 몰락이야말로 구원의 결정적 단초이자 실마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주간,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 그의 운명이 몰락으로 고꾸라져 가는 사건들을 묵상하며 우리 마음에 다시 새겨 보아야 하는 내용 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역사에 기여한 대단히 독특하고도 소중한 영적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저는 김순회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식사도 같이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행여 제가 먼저 밥값을 계산할까봐 권사님은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서 손으로 집어들 여유도 없는 듯 입에 물고(한 손에 장애 있으심) 카운터로 돌진하셨습니다. 저는 서두르다 넘어지실까 싶어서 이번엔 권사님께서 계산하시고 다음엔 저희에게 기회를 주시라고 안심 시켜드리고 제가 그 돈을 받아 밥값을 지불함으로써 사태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밥을 먹기 전, 권사님과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불행한 운명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이 말씀의 주제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고난이나 불행한 운명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과 불행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의 불행한 운명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따르면 누군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누군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부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근거로 권사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고난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맡긴 사람에게 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그러나 구원은 고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도 타인의 삶을 구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난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동 현장에서도 해고와 투옥의 고난을 당하는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들의 권리를 구원하고, 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을 위로할 힘이 없으나 반대로 병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위로할 능력이 있고, 상처받은 사람의 상처는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제가 된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역설적 진실이라고,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종류의 구원은 언제나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받고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권사님께 찾아올 때, 혼자 오더라도 그것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권사님을 찾아뵙기 원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오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미안한 마음들과 함께 오는 것이고 편찮으신 권사님께 빚진 마음을 가진 모든 건강한 사람들의 민망한 마음들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몸도 편찮으신 권사님을 앞에 두고 제가 별별 좋은 말은 다 했습니다. 이런 말을 쉬지도 않고 나불나불 말할 수 있는 자신이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거라도 해야 했고 그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의 말이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일지라도 권사님께는 부디 하나님 말씀으로 들리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몰락과 고난의 의미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았다는 저의 말은, 즉 고난과 몰락은 구원의 단초요 구원의 실마리라는 저의 말은 모두 입에 발린 소리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양날의 검처럼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버린다는 히브리서4,2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 자신이 제 말에 대하여 진정성을 가진 인격이 될 때, 그리고 결국 궁극적으로는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만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자신의 몰락이 눈앞에 이른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겟세마네라는 곳에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자신의 몰락이 임박했음을 알았을 때, 예수님이라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37절에 따르면 예수님도 근심했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38절에 따르면 제자들에게 두려운 자기의 마음을 여과 없이 표현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무슨 말씀입니까? 두려우니 내 곁에 있어 곁을 지켜 달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것은 흔히 위인전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태도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옛날 전태일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청계천 6가에서 시위 도중 분신을 시도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전태일도 영웅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쓰러져 그의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 누군가 그를 부둥켜 안아주자 무서워요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아이고, 아이고 하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 무서운 걸 어떻게 견뎠어?”하는 탄식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전태일의 두려움을 보면서, “그들의 죽음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영웅의 죽음이 아니라 평범한 내 이웃, 내 형제, 내 피붙이의 죽음이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때때로 그들의 죽음이 곧 나 자신의 죽음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본문 39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간단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예수님도 자기의 몰락이란 운명이 자기를 비껴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두려운 운명을 피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운이 좋아서 운명이 자신을 비껴가는 가능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려운 운명을 맞이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바꾸는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첫 번째 가능성에 대해서만 기대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어쩌면 보다 확실한 방법은 두 번째 가능성, 즉 자기 자신을 바꿔버리는 방법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선택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할 것이라면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고 보니 기도는 누가 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고, 기도란 자기를 송두리째 파괴할지 모르는 가혹한 운명이 다가오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으려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란 자기의 일시적 안전을 위해 자기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크게 파괴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아버린 인간의 몸부림일 것이란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몰락의 두려움을 오롯이 생(쌩?)으로 견디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몰락을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러나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나약한 인간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그토록 견디게 만들고 버티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 없는, 바꾸지 못하는 자기(정체성)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바꾸지 않을, 바꾸지 못할 나를 발견했는가 묻게 되었습니다.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 드립니다. 파블로 네루다 라는 시인이 고양이 찬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매우 긴 글인데, 한 부분을 소개하면 내용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물고기나 새였으면 바라고 / 뱀은 날개를 원하고

개는 자신이 잘못 태어난 사자라 믿고 / 엔지니어는 시인이길 바라고

파리는 제비의 비행을 연습하며 / 시인은 파리를 질투하는데,

오직 고양이는 / 고양이 자신 이외의 그 무엇이길 원하지 않는다

 

저는 이 시를 읽고 오히려 고양이가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나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존재를 부러워하고 나의 처지가 불안할 때마다 그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나를 어떻게 바꿔버릴까 근심 걱정하며 늘 자기 배반의 카드를 매만지며 마음이 썩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번 고난주간에는 저 역시 예수님의 기도를 더 깊이 묵상해 보려합니다. 도대체 몰락의 운명 앞에서, 모든 근심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나'(정체성)란 무엇인지 탐구해 보려합니다. 이것은 바로 구원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의 처지가 내 입맛대로 바뀌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처지에 처하더라도 혹 그것이 나의 몰락이라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바꾸지 못할 자기의 본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참된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구원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종류의 구원을 대단히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보여준 예를 마틴 루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이제까지 발표된 모든 견해를 철회하지 않으면 교회로부터 파문되고 모든 법적 보호가 해지될 것이란 경고를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루터는 잠시 기도의 시간을 요청했고 기도 후 보름스 국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남겼습니다.

 

이성과 양심이 나를 반박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바꾸지 않을 것이며 나의 어떠한 견해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여 나를 도우소서!”

 

우리는 흔히 일신의 안전을 위해 양심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루터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 그러기 위해 자기를 바꾸는 행위는 옳은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루터가 몰락의 운명 앞에서도 바꾸지 않을, 바꿀 수 없는 확고한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발견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루터의 구원이었다고 믿습니다.

 

저는 루터만이 아니라 저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어 간다면 루터가 얻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올 사순절의 마지막 절기인 고난주간에 저는 예수님의 몰락과 그 몰락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더 깊이 더 많이 묵상해 보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문밖교회 교우들에게도 권해드립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시며 기독교 영성이 발견해낸 고난과 몰락의 가치를 새롭게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몰락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바꾸지 못할 '자기'를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발견하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축도

이 땅의 고난 받는 자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고난과 몰락의 상황에 놓인 자들에게 더욱 당파적 애정을 쏟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몰락과 고난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 주시는 성령과의 아름다운 교제가 성문밖교회에 속한 신앙의 가족들의 삶 속에 또한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신우들의 삶 속에 영원히 계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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