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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8, 28; 16, 1-11

설교제목: 죽음을 삼켜버린 생명

 

대단히 긴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입니다. 우리가 흔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또는 그냥 모차르트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음악가입니다. 그가 천재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그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차르트는 1756127일에 태어나 1791125055분까지 결코 길지 않은 35년의 생애를 살다간 음악가입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화들은 많습니다. 그는 불과 3세의 나이에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습을 단지 보기만 하고 피아노 연주를 익혀 버렸다고 합니다. 모차르트가 4살이 되었을 때,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본 아버지 레오폴트는 자기 역시 음악가로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음악활동을 때려치우고 아들의 음악교육에 올인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레오폴트는 시원찮은 음악가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악 선생이었고 대주교의 궁정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이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5세의 나이에 이미 작곡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이런 노래나 부르며 한 참 동심을 키워갈 다섯 살 나이에 모차르트는 유럽의 음악계에 혜성같이 데뷔하여습니다. (1762년 음악여행 시작) 그리하여 그는 비록 35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30년의 음악가 경력을 남겼습니다. 모차르트! 그는 실로 35년간의 생애로 세상을 은퇴할 자격이 충분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신학자의 한 사람인 칼 바르트는 바로 이 모차르트를 너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자였지만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에 대해 책도 남겼고 <칼 바르트가 쓴 모차르트 이야기(원제목: 모차르트와 나)> 또 여러 가지 모차르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는 1955213일 스위스 취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은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천국에 가서 만나보고 싶은 첫 번째의 인물은 누구인가요?”그러자 바르트는 가장 먼저 모차르트에게 안부를 전하고 그 후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신학자로서 왜 신학자가 아닌 음악가를 먼저 만나고 싶은 것인가요?” 그러자 바르트는 나의 일용할 양식 속에는 모차르트의 음악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르트는 평생 그의 아내가 틀어주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서야 잠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도 깨어나지 않았던 1968년의 129일은 그의 생애 마지막 날이었다고 합니다.

 

칼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교회교의학입니다. 바르트는 이 책의 33337-339페이지에서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르트가 이 책에서 모차르트를 신학자라고 부르고 그의 음악을 신학이라고 말하는 점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모차르트는 1756127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 1755111일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날은 모든 가톨릭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이라서 대부분의 시민이 교회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날의 지진은 무려 6만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대재앙이었습니다. 이 리스본 대지진은 전 유럽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뜨려 버렸습니다.

 

인간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평가가 높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일시에 앗아가실 수 있는가? 더구나 자기를 사랑하여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이렇게 한 순간에 죽이실 수 있는가? 사람들은 질문했지만 어떤 철학자도 신학자도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 앞에서 사람들이 본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운명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의 폭력 앞에서 나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모습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고 우연한 사건에 의해 우연히 사라져 가는 존재에 불과하구나! 이 시대의 사람들이 리스본 대지진을 통해 본 것은 인간, 자신들의 비참한 종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란 과연 신의 선물일까? 아니면 형벌일까? 인간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존재의 근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의 정서였습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정서는 삶에 대한 무의미와 비관주의였습니다. 이 시대의 문학도, 철학도 비관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시대의 비관주의를 뚫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의 책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직 모차르트의 음악만이 이 시대의 비관주의를 넘어서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눈으로 보게 될 바로 그것을 들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그것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운명이다.”

 

모차르트가 들었다는 종말의 메시지, 종말로부터 들려온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운명에게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어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곧 인간의 운명이란 메시지였습니다.

 

바르트는 이어서 말합니다. “모차르트는 동시대 사람들이 끝장이라고 말하는 사건으로부터 창조의 화음을 들었다, 모차르트가 들은 창조의 화음이란, 인간의 삶 속에 어둠이 있으나 그 어둠이 암흑은 아니다, 부족함이 있으나 오류는 아니며, 슬픔이 있으나 그것은 절망이 될 수 없다는 것, 우울함이 있으나 그것이 비극으로 변질되진 않으며, 인생에 괴로움이 그치지 않으나 괴로움 그 자체가 삶에 대한 절대적 강제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고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생의 즐거움이라할지라도 그것 역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창조의 화음이란 화두로부터 바르트는 계속 말합니다. “빛은 어둠에 싸여있기에 밝은 것이다. 달콤한 맛은 시고 떫은맛에 싸여있기 때문에 또한 싫증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의 화음 속에서 생명은 죽음을 잘 알고 있으나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영원한 빛이 밝아올 것이다. 리스본에서 죽은 자들에게도!”

 

의미를 조금 풀어보겠습니다. 어둠은 빛을 싸고 있는 껍질입니다. 껍질의 역할은 열매를 공격하거나 파괴하기 위함도 아니고 열매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매를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껍질인 어둠은 빛을 가리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의 밝음을 드러내며 또한 빛을 빛으로서 보존한다는 창조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시고 떫은맛은 단맛의 껍질입니다. 그러므로 시고 떪은 맛은 달콤한 맛을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콤한 맛을 드러내고 보존한다는 역설입니다. 생명을 에워싸고 있는 죽음 역시 생명을 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과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가치 있는 것으로서 보존한다는 창조의 역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창조의 역설이며 또한 모차르트가 들었던 창조의 화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창조의 화음, 창조의 역설을 지금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몇몇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이러한 창조의 역설과 창조의 화음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빛이 결국 밝아온다는 것이 모차르트의 음악이 표현한, 모차르트가 종말로부터 들었다는 소망이고 전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은 이 같은 모차르트의 종말론적인 전망과 소망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종말로부터 들었다는 메시지, 이것은 롬8, 28절에서 바울이 전해 주는 메시지의 내용과 같습니다. “28.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모차르트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종류의 운명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선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운명이 궁극적 선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안다.” 이것이 곧 롬8, 28절이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부정적인 것은 인생의 긍정을 싸고 있는 껍질이다, 그 둘은 서로 적대하거나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은 오히려 긍정을 드러내고 보존한다, 그러므로 부정의 최고봉, 부정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죽음 역시 생명을 파괴하거나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싸고 있는 껍질로서 오히려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보존한다, 이것이 창조의 역설이며, 모차르트가 들었다는 창조의 화음인데, 이것은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확인 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것은 마치 죽음이 생명을 영원히 삼켜버린 것 같았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영원히 이겨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힘, 궁극적인 지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부활의 증인들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힘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부정성이 영원히 깨져버렸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생명을 삼켜버린 죽음의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삼켜버린 생명의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쉽게 이해하거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여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들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두려움으로 넋을 잃었고 아무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오늘의 본문 막168절이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는 결국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어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조차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다고 오늘의 본문 막1611절이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어떤 사람이 쉽게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날의 그 어떤 사람이 죽음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메시지, 생명이 죽음을 삼켰으므로 죽음의 부정성은 깨지고 말았다는 메시지,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궁극적 힘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활의 증인들은 바로 이러한 부활의 메시지에 자기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존경하는 성문밖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의 증인들이 전해주는 부활의 메시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죽음의 권세를 믿지 마시고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증인들의 메시지, 죽음을 삼켜버린 생명에 관한 메시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자신의 삶이 생명의 능력으로 인도되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영역에서 만나는 이들을 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보이는 죽음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고 예수의 증인들에게서 들려오는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세상에서 생명의 능력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죽음을 삼킨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축도

죽음을 삼켜버린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들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침묵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죽음의 영역을 생명의 영역으로 바꾸어 가시는 생명의 능력 되신 성령과의 교제가 사랑하는 성문밖교회 모든 교우들의 삶 속에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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