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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메시야를 보다
요한복음 1:43-51
시골에 사는 촌놈이 호랑이를 잡아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 기사를 읽은 도시의 한 청년이 촌놈을 찾아 갔다. "자넨 무슨 수로 그렇게 큰 호랑이를 잡았나?" "아주 간단해... 일단 호랑이가 살고 있을 것 같은 큰 굴을 찾아 가라구.. 그앞에서 휘파람을 불어" "그러면 어슬렁 어슬렁 호랑이가 기어 나오지 그때를 놓치지 말고 총을 쏘면돼"
듣고 보니 무척 간단해 보였다. 도시 청년은 호랑이를 잡으러 떠났다. 그로 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두 청년은 다시 만났다.
그런데..... 도시 청년은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목발을 짚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시골 촌놈이 물었다. "아니 몸이 왜 그 지경인가? 내가 하라는 대로 했어?"
"물론 자네가 시키는 대로 호랑이가 있을 법한 큰굴 앞에가서 휘파람을 불었지" "그래, 그러니까........? “굴 속에서도 엄청 큰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부산행 새마을 열차가 나와서 덥치더라구!"

촌놈과 도심 청년의 모습에서 어떠한 차이가 느껴지는 유머입니다. 시골 촌놈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산속 깊은 곳 동굴을 찾았을 텐데 도시 청년은 호랑이를 쉽게 잡으려는 마음으로 인근 산에 뚫린 기차 터널을 찾았던 것입니다. 인생을 쉽게 날로 먹으려는 얄팍한 도심청년은 낭패를 보았습니다. 반면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을 제대로 찾은 시골 촌놈에게서는 왠지 듬직함이 느껴집니다.

벳새다라는 마을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어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이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부인 안드레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 이튿날 갈릴리로 나가시려는 참에 빌립을 만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부름 받은 빌립은 예수님이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보고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나다나엘은 가나 출신으로 벳새다와 인접지역이 고향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빌립이 찾을 당시 나다나엘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빌립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케 해 줍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살던 갈릴리 땅은 정통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멸시 받던 땅이었습니다. 주류 유대인들은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어 혼합된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갈릴리는 대부분 ‘암하레츠’라 불리는 하층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정치, 경제에서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가장 낮은 자들이 사는 갈릴리 땅에서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자신들이 사는 시대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름 받은 빌립은 예수를 만나고 그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빌립은 지체 없이 나다나엘을 찾았습니다. 빌립이 예수를 만나고 나서 나다나엘을 찾았던 이유는 빌립의 열망을 나다나엘이 함께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열망은 무엇입니까? 모세가 기록하고 선지자가 기록한 사람,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대망한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야는 누구입니까?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구원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모든 억압과 폭력 아래에서 해방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사막에 꽃을 피게 하고,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어 노는 세상, 다시는 전쟁하는 연습도 없는 세상을 만들 하나님의 메시야를 기록하였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기대하던 하나님의 역사는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현재의 삶에 반드시 이루어져야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난 사건을 이야기하며 메사야가 ‘나사렛 예수로 요셉의 아들’이라 말합니다. 빌립의 말을 듣던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나다나엘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대답 속에는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의 부정적인 한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얼마 전 어느 보고서에는 교육과 문화, 법조계와 정치, 경제계가 모두 부유층의 자녀들이 점유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절대 날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그나마 서민들이 정치와 경제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기회마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절망적인 마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말이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 예수를 ‘와서 보라’고 권합니다. 빌립은 비록 세상은 가진 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민중들의 삶을 철저하게 낮은 곳에 밀어 넣고 억압하고 있을지라도 자유케 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 몸으로 부딪쳐 보고 경험하라고 합니다. 빌립 자신은 이미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고 경험했기 때문에 나다나엘을 향해서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무화과나무 그늘에 함께 앉아 나누었던 모세가 말한 메시야, 선지자들이 기록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바라본 나다나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다나엘 또한 빌립을 알고 있기에 그는 빌립을 따라 예수께 갑니다. 빌립을 따라 나서는 나다나엘의 발걸음은 개천에서도 용이 날수 없게 만드는 세상에 도전장을 내어 미는 것입니다.

조선 말 1895년 4월 조선정부에 공단골교회 목회자인 무어를 통해 청원서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삽니다. 심지어는 관가에서 심부림 질하는 하치들까지 우리를 업스이 여기고 가끔 우리의 재산을 노략질해갑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는 날이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네들은 우리 빰을 가리고 옷을 찢고 온갖 악담과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그 자들은 우리를 잡아다가 강제로 일을 부려먹으며 엽전 한푼 안주면서 천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은 삼척동자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대말을 쓰는 일이옵니다. 이 세상에 어디서 이런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들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당하는 천대와 멸시란 이루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백정보다 더 천한 광대들은 갓도 쓰고 망건도 쓰고 소매옷도 입고 다니는데 당신의 비천한 충복 우리 백정들만이 그렇게 할 수 가없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뼈에 사무치도록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한국그리스도교의 신앙증언-

이 청원서는 백정해방운동을 위해 씌여진 것입니다. 조선시대 백정들은 최하층 계층으로 사회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조선정부에 청원서를 낸 것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상에 당당하게 권리를 내어 민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천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며 요셉의 아들 예수께 발걸음을 옮긴 나다나엘은 예수가 자신이 그토록 대망하는 메시야일까라는 기대 반 의심 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서에 약속되어 있고, 세상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세우실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오고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를 향해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도다”(47)라며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이면에는 ‘거짓 된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는 진리를 벗어나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한 질타가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 세상을 계급화하고 자본을 쫓아 사는 사람들과 권력을 추구하며 생명을 무참하게 짓밟는 사람들은 거짓 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말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온 힘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속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야곱’이 형 에서에게 쫓겨 살다 상봉하는 전날 밤 얍복강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포기하지 않고 싸움하여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속이는 자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형 에서와 상봉하여 극적인 화해와 은혜를 이루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상대에게 속임이 없이 투명하게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더 가지고 빼앗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거짓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며칠 전 한 인터넷 언론에서 청와대 기자들이 해외연수를 다녀오는 횟수가 늘었다고 고발했습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청와대 고위간부에게 해외 연수 청탁을 하기 때문인데, 많은 기자들이 가만있으면 자신만 바보 되는 것 같아 청탁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세상에 합류해서 똑 같이 불법을 행하는 세상에 휩쓸려 사는 모습은 참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은 세상에 대해 거짓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 속이는 저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며 존중할 줄 아는 사람, 거짓된 세상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정의와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씨름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나다엘을 바라보시는 예수께서는 속임수가 없는 나다나엘의 심성과 삶을 보시고 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칭찬에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삶과 신앙과 비전을 알고 말씀하시는지, 아니면 그냥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 받고 말씀하시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묻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소개를 받고 간 것입니다. 그의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에는 메시야라 불리는 예수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내려놓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다나엘의 궁금증을 확실하게 사라지게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율법을 공부하며 기도와 명상을 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나다나엘의 모습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모든 불합리하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시대를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메시야를 고대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날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하늘을 바라본 자신을 이해해주고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신앙고백이 거침없이 나왔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며 예수께 귀의하는 나다나엘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나다나엘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더 큰 일들을 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과 빌립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고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자신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누며 기대하고 꿈꾸었던 하나님의 역사, 메시야의 현존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이루어진 수많은 기적과 말씀들을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억눌렸던 자들이 해방되고 귀신들이 쫓겨나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하나님의 사람, 나사렛 예수 앞에 자신들과 똑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고, 세상의 생명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존재하며 모두가 존귀함을 지닌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를 따라 그들의 삶을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며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증거 하였습니다.

오늘 참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낮은 곳에서 메시야를 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선 곳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고 속임수를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꾸미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투명하게 내어놓을 줄 알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기를 힘쓰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것을 믿으며 자신의 삶의 자리가 개천과 같아 보일지라도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은 한국 상황에서 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역할이 중요합니다. 남과 북을 포함한 동북아의 평화를 이야기할 때 거짓 없는 평화, 폭력 없는 평화를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치와 경제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개인과 가족, 민족과 인류, 생태계를 포함한 모든 생명이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식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고민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갈릴리 땅에 살던 나다나엘이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로 믿으며 보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이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바라보고 구원을 노래하고 해방과 자유를, 평화를 외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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