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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반석 위에 인생이 가지는 생활 양식은 무엇인가?

모래 위에 인생을 살고 있는 현실이다.
나눔을 위한 삶의 절제도 결여되어 있고
모든 것이 소비뿐인 도시의 문화
아무래도 모래 위의 인생들 같아 보인다.

언젠가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날 때
후쿠시마의 원전처럼 우리의 핵발전소들도
사고가 나면 중국의 핵발전소에 문제가 발생되면
인생의 모진 바람은 언제든 올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현재의 경제구조,
소비문화는 분명 모래 위의 집을 짓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석 위에 인생!!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그저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지는 삶의 순간에서 실천되어질 때이리라.

분명한 건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고
핵이 터지고 방사능이 넘쳐나도
사랑하고 있는 마음, 사랑하는 삶은
반석위에 인생이라는 것이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는 건 오늘을 힘차게 사랑하기를 다하는 인생이리라.
사랑하면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쓸 것이다.



반석 위에 인생
마7:24-27
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29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ex) 두 마리의 노새
노새 두 마리가 등에 짐을 진 채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머슴과 밀가루 자루를 지고, 또 한 마리는 주인과 돈이 가득 든 자루를 지고 있었습니다. 주인과 돈 자루를 진 노새는 걸어가는 동안 이따금 다른 노새를 힐끔 쳐다보며 자신이 맡은 역할과 주인의 신분에 만해했습니다. 그래서 짐이 무겁게 등을 짓눌러도 잘참고 발목에 달린 종을 딸랑딸랑 우리면서 걸어갔습니다.
그때 돈 자루를 빼앗으려고 노리고 있던 도둑 떼가 나타났습니다. 도둑 떼는 머슴과 밀가루 자루를 진 노새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두 돈 자루를 진 노새를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저항하는 주인과 노새를 칼로 찌르고는 재빨리 돈을 빼앗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큰 상처를 입은 노새는 고통스럽게 신음했습니다.
“주인과 돈을 짊어진 것을 명예로 알고 열심히 일했는데, 아! 그 결과가 바로 이런 죽음이라니. 밀가루를 진 저 하찮은 노새는 살아남과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잠시 후 도망갔던 머슴과 밀가루를 짊어졌던 노새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주인도 노새도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바닥에 드러누워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노새를 보며 밀가루 자루를 짊어진 노새가 탄식했습니다.
“이보게! 밀가루 자루를 지든 돈 자루를 지든, 머슴을 태우든 주인을 태우든, 노세 신세는 달라지지 않는다네. 등에 태우는 사람의 지위나 신분이 우리가 노새로 살아가는 데 뭐 그리 중요한가? 너도 돈 자루를 운반하지 않고 밀가루 자루를 운반했더라면, 아니 충성심을 발휘하지 않고 주인과 짐을 재빨리 버리고 도망쳤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거라네.” -라퐁테 우화 중 -

우리는 우화 속 이야기를 듣고 내 자신을 한 번 점검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노새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재산과 명예, 권력의 많고, 적음, 낮고 높음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우주의 큰 흐름의 한 일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을 뿐 인간들 스스로 만들고 세워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특별해 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금 자루와 주인을 태운 노새처럼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한 순간 사라질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주의 큰 흐름에서 한 인간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7장의 전체 내용을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 7장 21절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반석위에 집과 모래 위의 집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반석위에 짓는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석위의 집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쳐도 무너지지 않을 집이라 하고, 모래위의 집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에 들이쳐 무너지는데 그 무너짐은 엄청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국제사회의 혼란과 국내 사회의 갈등, 개인적인 문제들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요즘입니다. 이러한 때에 반석위에 지을 짓는 것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나와 성문밖공동체가 그리고 국가와 인류사회가 혹시 모래밭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는지 더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반석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을 알아 볼 수 있는 척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어느 날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다가와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둘째는 무엇입니까?’ 묻는 율법학자에게 예수께서는 ‘둘째는 첫째와 다를 것이 없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풀어보면 ‘하나님사랑’ ‘자신사랑’ ‘이웃사랑’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좀 더 말씀드리자면 ‘내가 싫은 일은 남도 싫다는 것을 알고,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고 자신의 몸을 드려 서로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길에 버리면 누군가가 수고해야 하고 음식을 남기면 누군가가 배고파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가질수록 이웃의 누군가는 빼앗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리해지면 질수록 어느 누군가는 불편해 지고 힘겹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자신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삶과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사랑을 파괴하고 짓밟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 잘 되면 된다는 사고와 생활방식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을 인류 역사 속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개인을 넘어 민족과 국가, 인류적인 차원에서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을 가늠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면 분명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역사와 문화를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인디언의 후손인 오히예사가 지은 ‘인디언의 영혼’에 인디언들의 집터가 어떠했는지 이야기합니다.

‘나는 한 사람의 인디언이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으로부터 많을 것을 배웠으나 옳은 것과 공명정대한 것에 대한 인디언의 감각을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 인디언들의 민주적인 정신 속에서 세상은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열려 있으며,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인디언에게 문명의 사치품이란 없었다. 하지만 자연이 제공해 주는 순수함과 건강함이 있었다. 자연 속에서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인디언은 문명인들처럼 한 조직 속에 갇혀 기계적인 생활을 만족하기보다는 자유를 선택했다. 모든 영혼은 저마다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새롭고 부드러운 대지,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마주서야 한다.’

오히예사의 증언대로 인디언들은 서로를 평등하게 대했고 평등한 분배와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에 자신과 가족, 인생을 맡기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은 철저하게 무너져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백인들의 손에 의해 수많은 인디언들이 죽었고 그들의 땅은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호구역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격리되다시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불평등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조로부터 이어오고 지켜오며 신뢰하던 반석위의 집이 무너져 버리고 집터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히예사는 ‘기독교 문명이 주장하는 훌륭한 인격의 요소들은 인디언이라면 누구나 이미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던 것들’(p247)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의 삶은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부귀영화를 뒤따라온 백인들의 탐욕에 의해 그들의 반석위의 집은 파괴되었습니다. 오히예사가 말하는 얼굴 흰 사람들은 청교도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인디언의 땅에 들어와 소유를 내세워 인디언의 거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인디언들이 정성껏 짓고 지켜온 집을 군사력과 자본으로 철저하게 무너뜨렸습니다.

분명 인디언들의 생명과 땅을 빼앗아 국가를 세우고 기득권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청교도백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이라는 신제국의 자리에 앉아 세계의 경찰국가라 자부하며 세계 곳곳에서 무기무역과 전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작은 침략의 역사를 뿌리에 두고 있고 살인과 살육의 씨앗으로부터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뿌리와 집터를 반석 위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의 집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아 보입니다.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마7:17,18)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다국적기업들, 엄청난 군사력과 자본, 낭비되는 음식과 생활용품을 낳는 문화는 지구공동체의 부분에서 생각할 때 결코 반석위에 있는 집이 아닙니다. 미국뿐 아니라 자본을 집터삼아 세워진 대기업들과 국가, 개인에게는 예수의 배고픔을 달래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한국기독교 목사들은 미국의 번영과 영광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 설교하며 한국그리스도인들에게 미국의 경제와 군사력을 선망하게 했습니다.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공장굴뚝과 건물들, 무시무시한 군사력, 정치력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반석위에 집을 짓는 축복된 신앙이라 믿었습니다. 지금도 북한과 대치하며 더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삼아 모든 언론을 통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와 신앙은 모래위에 세워진 집에 불과 합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도 빠른 성장을 추구하였기에 나라 곳곳에 공장을 세워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한국사회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생태라는 반석위에 집을 짓기 보다는 성장, 경쟁, 이데올로기라는 모래밭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 결과는 독재였고, 기업주의 탐욕, 투기, 지역갈등 등 수 많은 문제들을 낳았습니다. 자연은 파괴되고 수많은 생명체는 도구화되어 고통 속에 신음합니다.

일본 후쿠시마에 지진과 쓰나미가 덮치면서 핵발전소에서 모든 생명에 유해한 방사능물질이 나와 땅과 하늘,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에너지를 쉽게 얻어 쓰려는 욕심이 불러온 화이고 아픔입니다.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20개의 핵발전소와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짓겠다는 포부를 가진 현 정부,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에너지 활용에 있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져 버릴 그것도 아주 심하게 무너질 집을 짓고 있습니다. 당장은 쉬워 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언젠가 한번 홍수가 나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너무나 참혹한 현실을 맞이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가까이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산둥에도 핵발전소가 있는데 우리나라와 그리 멀지 않는 곳입니다. 세계의 80%의 핵발전소가 동아시아에 집중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번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능유출을 보면서 조금 불편하고 더디 가고 약간은 배고플지라도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안전한 에너지 대안을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거리의 많은 노숙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하는 이들, 절망과 좌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비 장애인이며, 노숙인이 될 수 있고, 큰 중병에 걸릴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언제 어떠한 십자가를 지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크고 작은 개인의 문제, 사회, 국가의 문제들은 바람이 되고 비가 되고, 홍수가 되어 우리가 지어놓은 집을 덮칠지 모릅니다. 그러한 홍수가 들이칠 때 자신의 인생의 집을 어디에 짓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그 무너짐의 정도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인생은 사랑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매 순간 사랑의 마음과 생각, 실천을 살아간다면 홍수가 밀려와도 살아갈 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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