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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몸무게는 동일하다.
마태복음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와 같이 아니하느냐 47 도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인간의 편견입니다. 편견은 ‘어떤 사물 · 현상에 대하여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를 말합니다. 편견은 선입견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물과 현상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뭇 생명들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편견에 가득차 있던 사람들의 극심한 편견을 완전하게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가지고 613가지의 생활규범을 만들어 일상 속에서 실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사랑하되 적대적인 사람들은 미워하여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여도 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제국의 통치 아래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4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원수는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로마제국이었고 제국의 종노릇하며 자신들의 정치권과 경제권을 수탈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그들은 분명 수탈자였고 억압자였으며 불의한 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조들은 그들의 억압과 수탈에 언제나 저항했고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 페르시아 등 고대 제국들의 지배 아래서 억압받고 저항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했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도 하고, 정치종교 개혁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힘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167년 세계를 정복한 헬레니즘이 유대인들을 헬레니즘화시키려고 했을 때 마카베오는 독립전쟁을 27년간 했고 그 뒤를 자손들이 이어가며 독립을 얻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시대에는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박해에 대한 거부감과 괴로움이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국행위와 같은 것이었고 비겁한 배신의 행위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것입니다.

한국 전쟁이 끝 난지 60여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상처받은 몸과 마음이 사랑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을 봅니다. 6. 25 전쟁을 겪으신 많은 분들이 북한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대화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더욱이 아무리 굶주린다 하여도 먹을 것을 주기는 더 싫어합니다. 뉴스를 통해 보수단체들이 북한을 공격하거나 없애버려야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은 북한의 어린아이와 노인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했던 전쟁의 상황만을 생각하며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미워만 합니다. 평화를 말하고 실천하자는 모든 소리에 귀를 닫은 채로 마치 예수님 앞의 유대인들처럼 원수를 미워하듯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전쟁의 화신인 전 미국 대통령 부시가 6.22일 한국에 초청되어 평화 기도회에서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한국기독교입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며 행하고 있다는 집회가 참으로 딱하기만 합니다. 이는 한국의 많은 국민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 고위관리들의 신앙의 결과로 되어 진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북한의 어린아이와 여인과 노인과 젊은이들까지 모두 원수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44)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기독교의 교리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시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주로 고백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은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과 삶이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원수가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때리면 아프고 피가 납니다. 화도 나고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성서는 원수가 있거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그의 머리에 하나님의 진노의 숯불이 더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인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결코 모른 척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를 잊고 모른 척 못 본 척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저항이고 쉼 없는 실천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원수들의 행위와 같이 폭력적이고 비겁하고 얄팍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과 삶을 위해 함께 선한 길로 착한 길로 가자고 자신의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나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태양의 빛을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빛은 국가, 민족, 종교, 인종, 성별, 성소수인, 어린아이, 노인, 노동의 현장을 가리지 않고 비추입니다. 태양이 그렇듯 하나님의 사랑 또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 생명을 위해 동일한 사랑으로 지금 이시간도 모든 우주 안에 가득합니다.

탈무드의 교훈에 ‘무엇인가를 만들다 오른손의 칼로 왼손에 상처를 내었다하여 왼손으로 오른손에 상처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아래서 모든 생명은 하나 되어 존재합니다.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까지 굴러오며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그러한 폭력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습니다. 이 어둠의 독을 뿌리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기대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왼손을 찌른 오른손을 상처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원수를 찾아 헤매고 자신들의 형제에게만 인사하고 세리와 이방인들을 규정하여 정죄하고 미워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타 생명의 무게가 같지 않다고 봅니다. 차이가 있으며 자신의 생명이 더 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편협적이고 배타적인 생명이해를 찾아보았습니다.

남성에 의해 여성의 생명무게가 가볍게 여겨지다.

여성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간학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남성에 의해서 대변되었기 때문에 인간학은 왜곡되어 있고, 따라서 여성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들은 종교, 문화, 사상, 사회, 경제, 정치, 교육, 이 모든 영역들 역시도 남성에 의해 해석되어왔고 규정되어졌기 때문에 새롭게 재검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남성들은 역사의 긴 시간 동안 여성의 생명을 억압했고 그들의 노동과 사랑을 착취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골교회에서는 교회의 여성들이 강대상을 신성시하여 오르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강단에서 어떤 물건을 내려오는데 자신이 올라가지 않고 어린 남성인 저에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남성의 언어로 규정하고 해석하는 반복적인 상황 속에서 여성들의 종교성과 문화를 지배해온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장로교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주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여년밖에 안된 것은 한국교회의 남성문화가 여성들의 생명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식물의 생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깁니다.  

ex) 비둘기와 수도자의 생명무게

한 수도자가 숲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마리의 비둘기가 급히 날아 들어와 매에게 쫓기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합니다. 수도자는 살려달라는 비둘기를 자신이 품속에 숨겨주었습니다. 잠시 후 한 마리의 매가 날아왔습니다. 그 수도자의 품 속에 비둘기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매가 말합니다. “그 비둘기를 내게 주십시오. 그 비둘기는 나와 내 아이들이 먹을 먹잇감입니다” 수도자는 매에게 말합니다. “안 돼요. 이 비둘기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매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비둘기의 목숨만 중요하고 내 목숨과 아이들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나와 새끼들은 비둘기를 먹지 못하면 굶어 죽는단 말이요” 고민하던 수도사는 한 덩이의 고기를 원하는 매를 위해 비둘기를 내어주는 것은 할 수 없어 자신의 엉덩잇살을 떼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둘기도 살고 매도 살수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은 아프고 불편하겠지만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수도사는 저울을 가져다 놓고 자신의 엉덩잇살을 비둘기 몸무게만큼 베어 저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비둘기 몸무게가 많이 나간 것입니다. 수도사는 다시 제 살을 베어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비둘기가 더 무거웠습니다. 엉덩잇살을 다 베어도 안 되어 수도사의 두 다리를 잘라서 올렸습니다. 또 팔을 잘라서 올렸습니다. 그렇게 하여도 비둘기가 더 무거웠습니다. 수도사는 결국 자신의 온 몸을 올렸습니다. 그때서야 비둘기와 자신의 몸의 무게가 수평하게 되었습니다.

비둘기의 생명무게와 수도사의 생명무게가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어느 하나 하찮게 보지 않으십니다. 모든 생명이 자신의 숨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와 풍족함을 위해 뭇 생명들의 무게를 자신들의 발바닥 먼지쯤으로 생각합니다. 산하를 마구 파헤치고 온 땅에 농약을 뿌려댑니다.

한 농부가 트렉터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트렉터에서 내려 밭을 보니 지렁이며 개구리며 많은 생명들이 갈기갈기 찢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는 밭에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이제부터는 옛날처럼 소가 끄는 쟁기를 이용해 밭을 갈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의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생명을 존중하고 섬기는 삶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는 로마 병정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해하는 생명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사랑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함께 웃고 울며 사는 가족과 친구, 이웃들의 생명, 우주의 뭇 생명들에 대한 경외와 존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느낀다면 여름철 날아드는 파리와 모기의 목숨도 하찮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을 멍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들, 국가와 집단의 생명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생명의 무게를 내 생명의 무게와 동일하게 여기고 살아갈 때 세상의 변화는 시작될 것이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생명존중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하든 악하든 자신들 임의로 규정하고 함부로 정죄하거나 억압하거나 제재해서도 안 됩니다. 생명을 죽이는 일은 결단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완전하게 존중하며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생명을 완전하게 존중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주 안에 있는 생명의 무게는 모두 하나님의 수평저울에서 동등합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가정, 직장,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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