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5 23:26

내가 겪은 5.18

조회 수 2807 추천 수 0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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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이사회는 군부독제가 무너졌으니 민주화가 올것이라며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서울시내와 전국에서 가두 평화시위를 하고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를 바꾸고 노종조합이 없는데는 민주노조를 설립하는등 사회는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대학생들을 민주화와 계업령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하는등 서울시내는 평화와 민주화를 위해 각종 집회를 하고 민주화의 꿈을 꽃피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80년 4월과5월은 서울의 봄이 왔다고 서울의 봄은 평화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런대 1980년 5.18사건은 쓰나미 처럼 밀려 왔다.
우리 대일화학 노동자들은 5월17일 불광동에 있는 임마누엘 수도원에 수련회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일수련회는 인명진 목사님이 참석을 하시지 못할것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부산에 대중집회에 강사로 초대 받아 강의를 하시기때문에 실무진과 우리들만이 아쉽지만 진행하기로 하였다.
토요일6시 퇴근후 임마누엘 수도원에 도착해보니 목사님이 계셧다.
어떻게 된일인가 했더니 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서 집회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쓰나미가 오기전에 물속에 기포가 생기고 바닷물이 썰물처럼 빠졌다가 한꺼번에 대형파도로 몰려온다고 했다.
그렇듯이 나라의 어른들은 쓰나미가 오기전에 기포를 알아차린것이다
수련회에서 (서울로 가는길 참고)참된 삶이라는 주제를 놓고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촛불예배를 보면서 서로의 잔을 나누고 떡을 먹여주고 서로가 서로를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고 마음껏 웃어보기도하고 그동안 외로웠던일 다잊고 즐겁기만했다 목사님은 전에 고문때문에 생긴 디스크로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우리들을 지켜보셧다.
그러면서도 앞으로가 걱정이라며 남몰래 한숨을 쉬시곤하셧다.목사님 무슨걱정이세요? 우리들이 철부지처럼 물어보면 목사님은 나라가 걱정이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하셧다.....()
밤1시가 되어 내일을 위해 잠을 자기로하고 누워 소근소근 이야기를 하는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여기저기 불빛이 왔다갔다하다가 창문을 두드리며 인명진 목사님을 나오라고 하였다.
못나간다고 하자 호루라기를 불고 불빛을 비추고 군화발소리는 요란하고 개짖는 소리와 수도원은 삽시간에 공포로 휩사이고 있었다.
수도원 주위는 형사들이 포위를 하고 외곽에는 총맨 군인들이 지키고있고 금방이라도 무슨일이 일어날것만 같았고 우리는 목사님 어떻게 하냐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캄캄한 한밤에 무슨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는체 너무나 답답하기만 하였다.
형사들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호루라기를 불고 공포총을 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고 목사님은 기도만 하시는듯했다
감옥을 세번이나 갔다온 목사님은 갖은 고문으로 몸도 다상하셧는데 구속되면 어떻게 하냐며 울고있는 우리를 위로하시면서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인것같았다.
계속해서 그렇게 한시간가량을 공포속에 있는데 형사들은 주인을 데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와 목사님을 끌고나가고 우리는 공포속에 어쩔줄 모르고 목사님만 부르며 따라다니다가 형사들이 강하게 제지하고 가로막아서서 우리를 차단하였다.
그래도 목사님 잡혀가면 안된다고 매달리자 우리를 죽고싶냐고 협박을 하면서 강하게 뿌리치고 목사님을 차에 태우고 목사님 머리를 차밑에 처박은체 군인들의 호위속에 차는 그렇게 출발하고 우리는 전쟁속에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고만 있을뿐이였다.
목사님이 그렇게 연행된 새벽 우리는 통행금지를 해제되기를 기다려 수련회 중간에 교회에 와서보니 우리나라에 민주인사와 양심수들은 어젯밤에 모조리 잡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행방도 모르고 계업령은 더욱더 강화선포되었다.
쓰나미가 오기전 바닷물이 썰물로 빠져나갈때 이땅의 모든 양심수와 민주이사는 바다로 밀어넣고 거대한 파도는 광주를 향해 덮쳤던것이다.
인도양 해변에서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던 11만7천명의 생명을 앗아가듯이 80년5월 광주도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민주화를 꿈꾸는 시민을 무지막지하게 쓰나미처럼 할켜갔다
어느날 어느 전두환의 총에 수많은 광주시민은 죽어갔다
서울에서는 광주에서 무슨일이 있는지 알지못한채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는 소리만 들리지 모든매스컴은 차단이 되어있었고 우리는 공장에서 가슴만 조리며 가끔씩 전해주는 유인물을 통해 광주의 소식을 전해받을수 있을뿐 아무런 뉴스도 없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뉴스만 계속되고 우리들은 공장에서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지만 거리는 총맨해병대들이 활보하고 노동운동하는남자들은 어느날 삼청대로 끌려가기만 했다.
입이있어도 말을 할수없는 그시간들은 마치 지옥이였다 절망만 하고있을뿐 희망이라고는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할수있는일이라곤 우리를 위해 공부를 해두는 일밖에 없었고 노동단체와 각종단체들은 지하로 들어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나는 지금도 나의 가슴은 80년5월에 머물러 있다.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있었던 밤은 너무나 큰충격이였고 사랑하는 목사님을 빼앗기면서도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그날밤은 지금도 목사님께 두고두고 죄송하기만하다.28년이 지난지금도 박덕순선배는 그날꿈을꾸곤 한다고 한다.내가 한나라당에 강하게 적을 두는것도 내마음에 어떠한 피해의식이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ps)내가 16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목욕탕에서 신부름6개월정도 하다가 17살에 대일화학에 입사했고 산업선교회는 1976년도때부터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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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은정 2008.05.16 09:43
    집사님, 올려주신 글은 여느 글 보다 생생하고...그때의 공포와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고맙습니다. 선배님들의 이런 시간과 노력이 있었기에 열린 공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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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댁 2008.05.16 11:35
    1980년이면 제가 초등학교 막 입학했을 때네요. 경상도에서 즐겁게 학교 생활을 했던 시기에 광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꿈만 같습니다. 다시는 이런 시절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에게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합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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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희망 2008.05.19 19:35
    대학교 2학년때 야학에서 처음 광주민중항쟁 다큐멘터리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정말 다큐를 보았을 뿐이었는데 살떨리고 놀란 경험으로 기억됩니다. 그 당시의 희생과 아픔이 지금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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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이 2008.05.20 22:02
    ㅇ ㅏ...
    그러게요.. 정말.. 그 때 시절이었슴..
    저는 어떻게 했을까... 그런생각해욧..
    정말 용기있는.. 멋진.. 분들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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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이 2008.05.20 22:03
    그런데.. 오늘 우리 나라는.. 먼지..
    ㅇ ㅏ.. 답답해서 아무말 안 나오ㅏ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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