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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세개를 엮어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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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은 첨부합니다.

정혜신 박사가 말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위한 치유센터 와락이 생기기까지
(수유너머 위클리 황진미의 2011년 11월 인터뷰 중)

“2005년도에 민가협(민주화운동을 위한 가족협의회)에서 과거사진상위원회에 진정을 넣어 민주화운동보상금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심리적 내상을 치유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물질적 보상이 그분들 삶에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심리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고문피해자분들은 80년대 간첩으로 몰려 수 십 년 씩 감옥에서 보냈던 분들입니다. 그 결과 가족들마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적 고립을 겪어야 했고, 그런 과정에서 가정이 파괴되었던 분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국가폭력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파괴된 분들이시지요.
제가 쌍용차 해고자들을 상담할 때에도 그분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고통의 문제에 민감하시고 피해자의 입장에 깊이 공명하시는 분들이죠. 이분들이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의 치유센터인 “와락”을 건립하는데 2천만원을 내주셨습니다. 사실 그분들이 무슨 큰돈이 있겠어요? 재심을 받아 무죄판결로 보상금 받은 것을 기탁한 돈들이죠. 국가공권력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이 그 보상금으로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들의 고통을 치유하는데 출자했다는 점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와락’은 치료와 치유의 두 가지 접근이 통합된 치유센터입니다. 전문적인 상담이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 먹임으로써 일상의 행복을 회복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와락’이 정말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택의 ‘와락’이 성공을 거둔다면, 앞으로 한진중공업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영도 ‘와락’ 이나, 제주 강정마을 ‘와락’도 생길 수 있죠.“

인권운동가 류은숙이 말하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애도가 필요한 이유
(인권오름 343호에서 발췌, )

대한문은 어떤 곳인가? 역시 ‘사회적 타살’이라 지목되는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24명의 죽음을 추모하는 곳이다. 1년 전 ‘더 이상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가파르게 이어지던 자살 곡선을 멈추기 위해 천막 농성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정부는 비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던 그 작은 천막을 염치도 없이 철거해버렸다. 지난 4월 4일의 일이다. 대한문 앞 인도 위에 급조한 화단이 만들어졌고 공무원과 경찰들이 매일 나와 그 화단을 지킨다. 해고 노동자들은 화단 앞 맨 땅 위에서 하늘을 이고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추모와 애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충분한 추모와 완전한 애도란 가능치 않다. 그런데 우리는 왜 추모와 애도를 계속하는 것일까? 저명한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 “예리한 느낌”이란 건 뭘까? 나의 운명과 당신의 운명이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숱한 인연 중 어떤 인연을 상실할 때, 내가 잃어버린 것은 그 인연을 구성하는 상대방인 ‘당신’만이 아니다. 잃어버린 ‘당신’과 함께 ‘나’ 역시 사라지게 된다. 또 나와 당신의 관계는 전적으로 나와 당신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특별하게 구별 지으면서도 연결하는 인연들, ‘우리’의 관계성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그런 중요한 관계의 끈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애도는 혼자서 골방에서 슬퍼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는 복잡한 수준의 정치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희생이 노동자들에게만 전가된 불평등함을 지적한다. 또한 이 사회 속에서 노동자 신분이 겪는 불평등과 무시를 호소한다. 이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과 죽음이 애도할만한 삶으로 여겨지는가?’는 공통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샘터가 말하는, 우리가 5월 광주와 쌍용차 노동자들을 함께 기억해야할 이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33년이 지났지만 폭력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518 생존자들은 긴 시간 동안 말 할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쌓인 억울함과 사회에서 부정당한 자신의 존재는 고스란히 한 개인의 몸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77일의 옥쇄파업 이후 마찬가지로 폭도로 몰리거나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처럼 취급되었습니다. 폭력의 기억은 회복되지 못하는 일상의 고통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치유센터 와락을 운영하는 정혜신님이 이야기합니다. 쌍차 노동자들은 여전히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것은 일상적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새 스물네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건강 상의 문제였다고만은 결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의 죽음은 사회적 살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국가폭력이 한층 더 가혹해진 지금, 목소리 없는 자들의 고통에 눈감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새롭게 연대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외롭게 놓아두지 마십시오. 사회적 고통은 혼자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것이 518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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