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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올 거야. 우리가 쓰러질지언정 그날이 와"
[인터뷰] 쓰러진 동생 걱정에 밤 지샌 문정현 신부

                                                         조태근 기자 taegun@vop.co.kr "

용산에서 6명 죽이고도 다 못 죽여서 우리까지 죽이는구나...모두 다 죽이려고 하는구나 이놈들이..."

"쓰러지고 나서 바로 전화를 받았어." 문정현 신부는 동생 문규현 신부가 22일 새벽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군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용산역에 내려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6월까지 지리산에서 임진각 망배단 천리 길을 124일 동안 오체투지로 순례한 문규현 신부는 쉴 틈도 없이 주임신부를 맡은 전주 평화동성당과 참사가 벌어진 용산을 오갔다.

이달 12일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미사에서는 전종훈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신부가 삭발을 하고 정부의 사과 등 용산 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강론을 했던 문규현 신부도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23일 용산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앞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는 그때 동생의 단식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너무 무리를 했어. 용산에서 전주까지 왔다갔다 했잖아. 올해는 3월에 계룡산에서 임진강까지 오체투지 100일을 넘게 한 뒤였으니...

일주일 전에 전종훈 신부와 함께 단식을 시작했는데, 과로한데다 전주에서 서울까지 무리했어. 12일 명동성당 앞 미사에서 문 신부가 강론을 하고 단식을 선포하더라구. 그때도 지친 상태에서 많이 아팠지. 만류도 많이 했어. 그런데 아무리 동생이지만 예순 넘은 사람을 말린다 될 게 아니었어."

단식 중에도 문규현 신부는 광주, 인천 등 지방으로 강의를 다니고 전주 평화동 성당과 용산을 오갔다. 문정현 신부는 "용산에서 6명 죽이고도 다 못 죽여서 우리까지 죽이는구나 싶었어. 모두 다 죽이려고 하는구나 이놈들이... 의사를 믿고 하늘을 믿는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검찰이 지난 21일 남일당 망루 농성 철거민들에게 징역 8~5년의 중형을 구형한 지 하룻만에 문규현 신부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남일당 건물 주변은 우울한 분위기였다. 문정현 신부는 검찰의 구형이 무리했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익숙하지만 이 사람들(유족들)은 처음이잖아. 게다가 어제 문 신부까지 쓰러져서 유족들도 모두 충격을 받았어"라고 말했다.

전날 병원에 잠시 들렀던 문정현 신부가 이날 병원이 아닌 남일당으로 향한 것도 그래서였다. 문 신부는 "병원에 가봤자 병문안 손님 맞는 것 밖에 더 있어? 어제 병원 들렀다가 여기 남일당이 더 중요해서 여기로 왔어. 유족들에게도 가지 말자고 했어"라고 말했다.

그래도 문정현 신부는 지난 밤 내내 동생 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뤘다.

"어제 병원에 가니까 원목실 신부님이 죽기전에 마지막에 받는 '병자성사'를 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전종훈 신부하고 들어가 그렇게 했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리고 어젯밤에 여기(남일당) 와서 11시까지 있다가 집에 갔는데, 잠이 안오더라구. 눈물이 너무 나고.. 오늘 새벽 5시에 잤다가 6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여기 왔는데 밥도 안 먹히더라구"

한참 동안 쓰러진 동생 걱정에 말을 잇던 문정현 신부는 검찰 얘기가 나오자 "이제부터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 신부는 "그 형량이 경찰한테 가야 할 것이야"라며 말문을 열었다. 손짓과 함께 "여기서 7개월째 보내면서 듣고 본 거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불이 나게 됐고, 죽음의 (원인)자체도 확실치 않잖아"라고 말한 문 신부는 "(망루 희생자들이)맞아 죽었거나 맞아 죽은 사람들을 (경찰이)불 속에 내버려 두고 나왔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어떻게 철거민들에게 그렇게 구형할 수 있어?"라고 성토했다.

수사기록 3천쪽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검찰을 꾸짖으면서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했다.

"나는 이제부터 싸워야 한다고 봤어. 변호인들(이 바뀌는) 파동이 일어난 것도 재판부가 할 일(검찰의 수사기록 3천쪽 공개)을 못해서 그런 거야. 3천쪽이 없으면 재판은 의미가 없어. 공정한 재판을 하려면 (미공개 수사기록)도 맞춰봐야 하는데 공정성을 접은 채 하는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 생각에 나는 그 이후로 재판 방청도 안가. 다음주에 판결이 나지만 판결은 정당할 수 없어."

문 신부는 "이런 재판에는 기대할 게 없어. 6명을 죽이고, 공정한 재판도 안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을 잡아 가뒀는데, 신부까지 사경을 헤메게 만들었어"라며 말을 이었다.

"울분이 터져. 6명 죽이고도 모자라 더 죽이려고 하는지... 그러면 해보자. 죽더라도 이 행위를 접을 수가 없어"


사제단 신부들이 단식농성을 하던 남일당 건물 앞 천막은 비닐로 닫혀 있었다. 다른 신부들은 문규현 신부가 입원중인 병원에 가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유가족들이 남일당 건물 앞 평상에 둘러앉아 손님을 맞던 모습도 찾기 어려웠다.

점심 무렵이 되자 식사하러 들어오시라는 목소리가 문정현 신부를 재촉했다. 일어서려는 문 신부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진실이 가려질 수는 없어. 6명이 죽고, 문신부도 그렇고, 유족들의 아픔, 세입자들의 고통이 그냥 덮어질 수는 없어. 5명의 희생이 긴 행렬을 모았듯이 유가족, 전철연, 범대위, 사제단의 고통이 그냥 덮어질 리가 있나.

우리 사제단은 가시적인 성공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야. 이런 것을 그냥 덮어둘 수가 없어. 언제까지나 이 행렬을 가져가야 돼. 그러다가 어느날 그날이 올 거야. 우리가 쓰러질지언정 그날이 와. 갑자기 올 수도 있고... 정부에 대한 기대보다도 우리가 먼저 투신하고, 입을 열고 하는 길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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